‘파테이 마토스’…삶은 고통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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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테이 마토스’…삶은 고통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다
  • 한정주 고전연구가
  • 승인 2023.05.22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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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인생수업]⑬ 소포클레스 『오이디푸스 왕』…삶의 본성:불예측성과 불확실성Ⅲ
미카엘 스베르츠 作, 아테네 역병(유화 118.7×170.8㎝),  미국 로스앤젤레스미술관 소장.
미카엘 스베르츠 作, 아테네 역병(유화 118.7×170.8㎝), 미국 로스앤젤레스미술관 소장.

[한정주=고전연구가] 오이디푸스의 왕국을 덮친 뜻밖의 재앙, 즉 역병(전염병)은 테바이 사람 전부를 죽음의 세계로 데려가지 않는 한 절대로 끝날 것 같지 않아 보였다.

테바이의 모든 주민들은 예전 스핑크스의 재앙보다 더 격심한 절망과 죽음의 공포에 휩싸인 채 “왜 우리가 이토록 잔인한 불행과 고통을 겪어야 합니까?”라고 오이디푸스 왕에게 묻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처남 크레온이 들고 온 아폴론의 신탁 하나가 오이디푸스 왕 앞에 도착했다.

크레온이 들고 온 아폴론의 신탁은 오이디푸스 왕이 과거에 저지른 행위가 낳은 엄청난 결과를 깨닫기 위해 반드시 겪어야 하는 ‘고통의 통과 의례’였다. 테바이에 은밀하게 찾아든 뜻밖의 재앙, 즉 역병이 없었다면 아폴론의 신탁 역시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테바이의 역병과 거기에 뒤따라온 아폴론의 신탁은 인간은 고통을 겪지 않는 한 자신의 행위가 낳은 결과를 깨닫지 못한다는 ‘파테이 마토스(pathei mathos)’의 비극성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역병이 찾아들기 이전과 같이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면 오이디푸스 왕과 그 가문의 비극적 운명은 절대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오이디푸스 왕은 아폴론의 신탁이 던진 의문의 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을 통해 비로소 과거 자신의 행위가 낳은 비극적인 결과를 깨닫게 된다. 크레온이 오이디푸스 왕 앞에 들고 온 아폴론의 신탁은 이랬다.

“크레온 : 왕이시여, 그대가 이 도시를 바른 길로 인도하시기 전 우리에게는 라이오스가 이 나라의 통치자였지요.

오이디푸스 : 들어서 잘 알고 있네. 그분과 나는 생면부지니까.

크레온 : 그분은 살해되셨지요. 그래서 지금 신께서 그들이 누구든 살인자들을 벌주라고 우리에게 분명히 명령하시는 거예요.” (소포클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그리스 비극 걸작선』, 숲, 2010, p173)

아폴론의 신탁은 테바이를 덮친 역병의 재앙은 라이오스 왕을 살해한 살인자가 아직도 죄의 대가를 치르지 않고 이 도시국가 안에 숨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살인자를 찾아내 테바이에서 추방하거나 또는 “피로 피를 갚지 않는 한”, 즉 목숨을 빼앗지 않는 한 역병의 재앙은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메시지였다.

오이디푸스 왕은 즉각 라이오스 왕을 살해한 살인자를 색출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라이오스 왕 살해 사건을 밝히면 밝힐수록 그동안 어느 누구도 문제 삼지 않았던 오이디푸스 왕의 과거 행적과 관련된 이상한 사실들이 하나씩 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오이디푸스 왕의 과거 행적에 숨겨져 있는 ‘비극’의 징후를 감지한 왕비 이오카스테와 주변 모든 사람들은 더 이상 ‘라이오스 왕 살해 사건’의 진실을 밝히지 말라고 경고한다. 하지만 이미 의문의 함정에 빠져버린 오이디푸스 왕은 비극적 파멸을 예감하면서도 끝내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고야 만다.

오이디푸스 왕에 의해 마침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비극의 전모는-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정신분석학 용어 때문에 널리 알려져 있는 것처럼-오이디푸스 왕이 친아버지 라이오스 왕을 살해하고 친어머니 이오카스테를 아내로 맞아 2남2녀의 자식들을 낳았다는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오이디푸스 왕의 비극적 운명은 아버지 라이오스 왕이 과거에 저지른 추악한 만행에서 비롯되었다. 라이오스 왕은 젊은 시절 아름다운 용모로 제우스의 마음까지 사로잡은 미소년 크뤼십포스를 유인해 강간한 적이 있었다. 당시 수치심을 견디지 못한 크뤼십포스는 자살했고 분노한 크뤼십포스의 아버지 피리기아 왕 펠롭스는 라이오스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펠롭스의 저주를 들은 아폴론 신은 라이오스에게 자식을 갖지 말라는 벌을 내렸다. 그러면서 만약 자신의 명령을 어기고 자식을 낳는다면 반드시 그 자식의 손에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 후 라이오스 왕은 이오카스테와 결혼했고 두 사람 사이에서 오이디푸스가 태어났다. 아폴론 신의 무시무시한 저주를 떠올린 라이오스 왕은 신하에게 오이디푸스를 죽여서 키타이론 산에 버리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그 신하는 차마 오이디푸스를 죽일 수 없어서 몰래 키타이론 산의 양치기에게 건네주고 자취를 감춰버렸다. 양치기는 당시 자식이 없어 시름에 잠겨있던 코린토스의 폴뤼보스 왕과 왕비 메로페에게 오이디푸스를 주었다.

오이디푸스는 코린토스의 왕자로 성장하면서 행복한 삶을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연회에서 술 취한 남자로부터 출생과 관련한 충격적인 말을 듣게 된다.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는 오이디푸스의 삶에 심한 질투를 느낀 이 남자가 던진 한마디 말이 한순간 오이디푸스의 운명을 희극에서 비극으로 바꾸어버린다.

당시 그 남자가 던진 말은 오이디푸스가 폴뤼보스 왕과 메로페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친자식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출생과 관련한 엄청난 의문에 고통스러워하던 오이디푸스는 아폴론의 신탁을 구하기 위해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고 몰래 코린토스를 떠났다.

그런데 아폴론은 오이디푸스의 의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세 가지 저주스러운 예언을 전했다. 그것은 오이디푸스가 ‘자신을 낳아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살을 섞을 운명이며 세상 사람들에게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자식들을 보여주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었다.

폴뤼보스 왕과 메로페 왕비를 친부모로 알고 있던 오이디푸스는 코린토스로 돌아가면 아폴론의 저주스러운 예언이 실현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도망치듯 이곳저곳 방황하며 떠돌아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마차가 다닐 수 있는 세 길이 만나는 곳에서 신탁을 구하러 테바이를 떠나 길을 가던 라이오스 왕의 시종과 시비가 붙어 격투를 벌이게 되었다.

생사를 넘나드는 격렬한 격투 끝에 오이디푸스는 그 자리에 있던 시종들은 물론 자신을 낳아준 아버지 라이오스 왕까지 살해했다. 라이오스 왕을 살해한 후 오이디푸스는 앞서 살펴본 대로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고 테바이의 왕좌에 오르고 어머니 이오카스테를 아내로 맞았다.

결국 크레온이 가져온 아폴론의 신탁에 따라 라이오스 왕을 살해한 범인을 색출하는 과정에서 오이디푸스는 뜻밖에 자신이 라이오스 왕과 이오카스테 왕비가 낳은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오이디푸스 왕 자신에 의해 ‘라이오스 왕 살해 사건’의 진상이 세상에 온전히 모습을 드러낸 순간 오이디푸스 왕의 고통과 몰락 즉 비극은 시작된다.

어머니이자 아내인 이오카스테 왕비는 목을 매 자살하고 그 죽음을 목격한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탄식하며 스스로 눈을 찔러 장님이 되고 만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존경과 선망의 눈길로 우러러보던 행운과 지혜의 사나이 오이디푸스의 삶은 한순간 세상 사람들로부터 조롱당하고 배척당하는 가장 불운하고 불행한 삶의 주인공으로 전락하고 만다.

하지만 한 번 찾아온 불행과 고통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오이디푸스 왕의 천인공노할 범죄 때문에 자신의 도시가 역병(전염병)의 재앙을 겪고 있다고 생각한 테바이 시민들은 그를 추방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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