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조마루의 진술 vs. 죽은 남자의 아내의 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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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조마루의 진술 vs. 죽은 남자의 아내의 진술
  • 한정주 고전연구가
  • 승인 2023.04.17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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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인생수업]⑫ 아쿠타카와 류노스케 『덤불 속』…거짓과 진실 사이Ⅱ
아쿠타가와류 노스케의 『덤불 속』이 원작인 일본 영화 『라쇼몽』 중에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덤불 속』이 원작인 일본 영화 『라쇼몽』 중에서

[한정주=고전연구가] 다조마루가 진술한 이 사건의 ‘진실’은 이렇다.

“전날 정오 무렵 길거리에서 다케히로와 마사 부부와 우연히 마주친 나는 바람이 부는 바람에 삿갓에 드리운 천이 날려서 얼핏 여자의 얼굴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여자의 미모에 매혹당해 ‘사내를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이 여자를 빼앗자’고 결심했습니다. 나는 부부와 길동무가 되고 난 뒤 맞은편 산의 고분을 파서 나온 거울과 칼을 남몰래 산그늘 ‘덤불 속’에 묻어두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남자에게 ‘당신이 사고 싶다면 싸게 팔겠다’고 유혹했습니다.

보물의 유혹에 넘어간 부부는 산길로 말을 돌려세웠습니다. 산그늘 덤불 앞에 오자 나는 이 속에 보물을 묻어두었다면서 말에 탄 여자는 홀로 남겨 둔 채 남자만 데리고 덤불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나는 남자를 기습 공격해 제압한 다음 삼나무 밑동에 밧줄로 묶어버렸습니다.

다시 여자에게로 돌아온 나는 남자가 갑자기 병이 난 것 같다면서 그녀를 덤불 속으로 유인했습니다. 삼나무 밑동에 남편이 묶여 있는 모습을 본 여자는 품에서 감춘 단도를 빼들고 나를 공격했습니다. 거친 몸싸움 끝에 나는 여자의 단도를 쳐서 떨어뜨리고 결국 내 생각대로 사내의 목숨을 끊지 않고 여자를 손에 넣게 되었습니다. 내 목적은 남자의 목숨이 아니라 여자의 육체였기 때문에, 그때까지는 남자를 죽일 생각이 추호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덤불 바깥으로 도망치려고 하던 바로 그때 갑자기 엎드려 울고 있던 여자가 미친 듯이 내 팔을 잡고 매달리는 것이 아닙니까! 여자는 내게 띄엄띄엄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죽든지 남편이 죽든지 어느 한쪽이 죽어 달라. 두 사내에게 수치를 당하는 것은 죽는 것보다 더 괴롭다. 아니, 그중 어느 쪽이든 살아남은 사내를 따르겠다.’

그 순간 나는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남자를 죽이고 싶다는 충동이 격렬하게 치밀어 올랐습니다. 하지만 나는 비겁하게 여자를 차지하고 싶지 않아 남자를 풀어준 다음 정정당당하게 결투로 승부를 내자고 말했습니다.

남자는 아무 말 없이 두꺼운 칼을 빼들어 내게 덤벼들었습니다. 나는 스물세 합째에 남자의 가슴을 칼로 꿰뚫어 죽였습니다. 남자가 쓰러지자 나는 즉시 여자 쪽을 돌아보았는데, 어찌된 일인지 여자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습니다. 나는 여자를 찾아 삼나무 숲 사이를 다 뒤졌지만 끝내 찾지 못했습니다.

그때 남자와 칼싸움을 하는 사이 여자가 도움을 청하려고 덤불 속을 빠져나가 도망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습니다. 나는 남자에게서 빼앗은 칼과 활을 들고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났습니다. 덤불 속을 벗어나자 여자가 타고 있던 말이 조용히 풀을 뜯고 있더군요. 그래서 앞뒤 돌아보지 않고 말을 타고 도망치다가 어처구니없게도 떨어져 아와타구치 돌다리 위에서 끙끙대고 있다가 운 없게도 방면에게 붙잡힌 것입니다.” (아쿠타카와 류노스케 지음, 서은혜 옮김, 『라쇼몬 : 아쿠타카와 류노스케 단편선』, 민음사, 2014, p210〜215 참조)

다조마루의 진술이 있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진 죽은 남자의 아내가 청수사(淸水寺)에서 와서 참회어린 진술을 한다. 죽은 남자의 아내가 진술한 사건의 ‘진실’은 이렇다.

“저 도둑놈은 저를 욕보이고 난 후 삼나무 밑동에 묶여 있는 남편을 바라보며 비웃는 것 같은 웃음을 지었습니다. 저는 엉겁결에 남편 곁으로 쓰러지듯 다가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저 도둑놈이 순식간에 저를 넘어뜨렸습니다.

바로 그때 저는 남편의 눈 속에서 무언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섬뜩함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노여움도 아니고 슬픔도 아니고 저를 멸시하는 차가운 눈빛이었습니다. 저는 저 도둑놈에게 걷어차인 것이 아니라 남편의 눈빛에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 때문에 기절해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저 도둑놈은 온데간데없고 남편은 삼나무 밑동에 그대로 묶여 있었습니다.

남편의 눈빛은 여전히 차가운 경멸의 밑바닥에 증오의 빛을 담고 있었습니다. 부끄러움, 슬픔, 노여움이 뒤범벅 된 감정의 혼란에 휩싸여 저는 남편에게 함께 죽자고 말했습니다. 제 발밑에 떨어져 있는 단도를 치켜들고 저는 한 번 더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그럼 목숨을 제게 맡겨 주십시오. 저도 바로 가겠습니다.’ 남편은 저를 여전히 멸시하는 증오의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죽여’라고 외마디 소리를 내질렀습니다.

저는 거의 꿈속을 헤매듯 남편 가슴팍에 단도를 찔러 넣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또 기절하고 말았습니다. 다시 깨어나 주변을 둘러보니까 남편은 이미 숨을 거둔 뒤였습니다. 울음을 삼키고 남편의 시신을 묶고 있는 밧줄을 풀고 난 뒤 저는 남편을 따라 죽으려고 했습니다. 제 목에 단도를 꽂기도 하고 산기슭에 있는 연못에 몸을 던지기도 하고 온갖 짓을 다 해 죽으려고 했지만 죽지 못하고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저는 이제 죽을 기력조차 없습니다. 저는 도둑놈에게 치욕을 당하고 남편까지 죽였습니다. 앞으로 저는 대체 어떻게 하면 좋단 말입니까?’” (아쿠타카와 류노스케 지음, 서은혜 옮김, 『라쇼몬 : 아쿠타카와 류노스케 단편선』, 민음사, 2014, p215〜218 참조)

다조마루가 진술한 사건의 ‘진실’은 자신이 칼싸움 끝에 남자를 죽였다는 것이다. 비겁하게 살해한 것이 아니라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겨뤄 죽였다는 주장이다. 반면 여자가 진술한 사건의 ‘진실’은 부끄러움, 슬픔, 노여움의 감정 때문에 동반자살을 하려고 하다가 남편만 죽이고 자신은 죽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조마루가 말한 사건의 진실이 정정당당하게 남자를 죽였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면 여자가 말한 사건의 진실은 순간적인 감정에 휩싸여 남편을 죽인 죄 많은 여인의 참회에 무게를 싣고 있다. 전자가 정정당당하게 남자를 죽였다는 ‘다조마루의 생각이 개입된 진실’이라면 후자는 순간적인 감정으로 남편을 죽이고 난 뒤 참회하고 있다는 ‘여자의 심정이 개입된 진실’이다.

두 경우 모두 죽이려고 해서 죽인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죽였다는 생각이 개입해 사건의 진실을 구성하거나 혹은 재구성하고 있다. 그래서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상반된 두 사람의 진실이 모두 진실일 수는 없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면 두 사람 모두 거짓을 말하고 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자신에게 유리한 것은 진실을, 자신에게 불리한 것은 거짓을 말하고 있을 수도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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