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정 위기 극복한 100년 활터…군산 진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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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정 위기 극복한 100년 활터…군산 진남정
  • 한정곤 기자
  • 승인 2021.08.30 08: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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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터 가는 길]⑰ 신축 가옥 들어선 옛 사정 터…길잡이 표지석 설치

[드론촬영=안한진]

군산여자고등학교 담길을 따라 뻗은 좁다란 길이 월명산으로 이어진다. 월명어린이집을 지나자 길은 오르막으로 바뀌며 가팔라진다. 잠시 차를 멈춘 윤백일 군산 진남정(鎭南亭) 고문이 혼란스러운 듯 머뭇거린다. “4년 전 마지막으로 왔던 때의 길이 아니다”면서도 조금 더 가보자고 올라간 곳에는 하얀 신축 가옥이 들어서 있다.

대문 없는 입구에는 오창환·장정은이라 쓰인 문패가 나무 밑에 놓여 있다. 차를 돌릴 겸 마당까지 들어서는데 허리를 숙이고 텃밭에서 김매기를 하던 집주인인 듯한 여성이 빤히 쳐다본다. 차에서 내려 주변을 둘러본 윤백일 고문은 그제서야 “이렇게 변했나” 하며 반색한다.

군산에서 자동차부품대리점을 하는 집주인 부부는 이른 아침 낯선 불청객의 불시방문에도 매실차까지 내어 맞이한다. 오랜 아파트 생활이 지겨워 군산 주변의 땅들을 꽤 여러 곳 둘러봤다는 부부는 지난 2018년 공매로 나온 땅을 낙찰받아 새집을 지었단다.

군산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부부는 집터가 활터 정자 자리였다는 사실도, 과녁이 어디에 있었는지도 알고 있었다. 또한 옛 활터가 있었던 의미있는 자리라고는 하지만 누가 찾아오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며 반가워한다. 오창환 씨는 “낙찰받을 당시만 해도 뼈대만 남은 한옥 건물은 폐가나 다름없었고 온갖 생활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쌓여 치우는 비용만도 솔찬했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옛 진남정 터에 신축한 가옥. 주차된 자동차 자리가 사대였다. [사진=한정곤 기자]<br>
옛 진남정 터에 신축한 가옥. 주차된 자동차 자리가 사대였다. [사진=한정곤 기자]

마당 앞으로는 마치 산속 절집과 같은 한적한 시골의 목가적 풍경이 한눈에 펼쳐진다. 마당 끝 옹벽이 맞닿은 좁은 산길을 건너면 왼쪽엔 월명어린이집이 보이고 오른쪽엔 축대를 쌓아 올려 수평을 맞춘 땅이 떠받친 비닐하우스가 수목에 가려 꼬리를 빼꼼 내민다. 멀리 언덕 중턱엔 팔각정 하나가 운치를 더해주고, 그 오른쪽으로 다시 두 그루의 아담한 나무가 외롭지 않다. 오창환 씨가 한 마디를 더한다. “아마 저 나무 바로 밑에 과녁이 있었지요?”

봄에는 벚꽃과 동백꽃이 흐드러지고 대숲 사이를 헤집는 바람 소리가 시원했다는 주차장 앞 옛 사대가 있던 텃밭에서 과녁 자리를 바라보던 안한진 접장은 “활터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활터로 기억됐을 풍광”이라며 아쉬워한다. 사대와 무겁 사이가 움푹 패여 살이 계곡을 건너는 황학정, 나주 인덕정, 남원 관덕정과 비슷한 자연 그대로의 지형이다.

기부채납 형식으로 군산시에 양도했던 활터 부지와 사정 자리에 신축 가옥이 들어선 데 대해 윤백일 고문은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문화재 지정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사정을 보존함으로써 군산의 활쏘기 역사를 전하는 상징물이나 국악원 등 우리의 전통을 계승하는 용도로 활용될 것으로 알고 있었단다. 당시 진남정 사원들도 이 같은 보존을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군산시의 무관심으로 한동안 폐가로 방치된 사정은 결국 민간으로 매각돼 지금은 활터였다는 흔적을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옛 사대 자리에서 본 무겁. 멀리 두 그루 나무 밑에 과녁이 있었다. [사진=한정곤 기자]

윤백일 고문은 이곳이 예전 진남정 터였다는 기록이라도 있으면 좋겠다면서 입구에 조그만 표지석 설치를 요청한다. 부부는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 흔쾌히 “좋을 대로 하라”고 허락한다. 훗날 누군가 진남정의 역사를 따라 이곳을 찾는다면 표지석은 훌륭한 길잡이 역할을 할 것이다. 또 부부는 그들에게도 차 한 잔 내어주고 진남정의 옛 모습을 이야기하지 않을까.

◇ 민원과 부지 매각에 존립 ‘흔들’
군산 도심에서 멀지 않은 아름다운 자연지형의 활터를 포기한 채 진남정이 8km나 멀리 떨어진 외곽으로 옮겨간 이유는 오래된 활터들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고질적인 민원 때문이었다. 지금은 모두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지만 진남정이 옮겨가기 전까지만 해도 월명산 활터의 사대와 무겁 중간에는 무허가 민가가 다닥다닥 둥지를 틀고 있었다.

진남정이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것은 1928년이었다. 군산의 유림과 유지들이 뜻을 모아 1921년 옥구군 경포천변(현 경암동)에 첫 사정을 세웠지만 잦은 하천의 범람으로 7년 만에 터전을 옮겨와야 했다. 정면 4칸 측면 2칸 우진각지붕의 한옥 건물로 중앙 6칸 대청 옆에는 2칸짜리 온돌방이 있었다. 전면에는 세살 4분합문이 달려 안쪽으로 들어올릴 수 있었고 측면과 후면에는 처마 부분이 덧대어져 관람공간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그 앞쪽에 사대가 있었다.

옛 진남정 사정 전경. [진남정 제공]

그러나 사정 설립 당시 월명공원 부지였던 이곳에 한국전쟁 이후 하나씩 둘씩 피난민들의 무허가 가옥들이 올라갔고 여러 차례에 걸친 군산시의 양성화 조치로 무겁터 부근 토지마저 개인에게 넘어가면서 민원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군산시와 활터 이전도 논의됐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했고 지속적인 민원으로 활터는 제 기능을 잃어 진남정은 사실상 존립 자체를 걱정해야 하는 지경까지 내몰렸다.

윤백일 고문은 “활터에서 활을 쏠 수 없으니 입사하겠다는 사람도 없었고, 설령 있다 하더라도 받아줄 수도 없었다”면서 “연로한 구사들까지 사망하는 등 활터는 사원이 없어 더 이상 운영이 어려운 폐정 수순을 밟고 있었다”고 말한다. 활터 주변의 공유지를 피난민들의 주거시설이 잠식하자 행정당국이 무분별한 개인 매각으로 맞섰고 활터를 이끌어나갈 사원들의 노령화와 신사 양성까지 뒷전으로 밀리면서 폐정 위기에 내몰린 것이다.

위기는 또 다른 기회라고 했던가. 쓰러져 가는 사정 기둥을 붙들고 신성휴 사백 홀로 활터를 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던 당시 군산교도소에 근무하고 있던 교도관들로 구성된 국궁동아리 금양회(錦陽會) 회원 7~8명이 진남정에 입사했다. 군산교도소 앞 들판에 솔포를 설치하고 활쏘기를 하고 있던 이들은 군산에서 하나뿐인 활터 진남정의 폐정 위기를 외면할 수 없었다고 한다. 특히 입사 이후 군산시와의 협의를 통해 2003년 7월 군산 외항 오식도 배수지 안에 임시사정과 과녁 2개를 설치하고 회생의 길을 모색하는 등 재건에 힘을 보태며 고사 직전의 진남정을 되살려냈다.

옛 진남정 사대에서 본 무겁. 무허가 민가들이 과녁 밑까지 들어섰다. [진남정 제공]

당시 금양회를 이끌었던 서보균 접장은 군산을 떠나 현재 경주교도소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1996년 대구 관덕정에서 집궁한 그는 2002년 군산교도소로 전입온 후 활쏘기 보급을 위해 직원들을 모아 금양회를 창립했다. 2004년 용인 법무연수원 교수로 보임한 이듬해 교양과목으로 국궁을 개설했고 현재까지 법무부 소속 공무원들이 연수 기간 국궁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기반을 닦았다. 특히 법무연수원 내에 활쏘기 교육 전문 활터 법화정을 설립하기도 했다.

서보균 접장과 함께 진남정에 입사했던 회원은 채충근, 이형수, 서민철, 윤백일, 김영민, 이평범, 배인수, 남일성, 박현진, 이재용 등이었다. 현재 진남정에 남아있는 회원은 윤백일 고문이 유일하다.

◇ 진포 남쪽의 활터
논과 논을 가르는 사잇길을 빠져나와 널찍하게 조성된 광장 오른쪽 길로 접어든다. 층층이 쌓아 올린 석축 위로 파란 잔디가 곱게 깔린 최호(崔湖) 장군의 유지(遺址)가 말끔한 모습을 드러낸다. 최호 장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 옆으로 유품과 군산시 향토문화유산인 삼인보검 등을 보관한 기념관이 서 있다.

최호 장군은 1576년(선조 9년) 무과에 장원급제한 뒤 함경도 병마절도사, 충청도 수군절도사 등 여러 관직을 거쳐 정유재란 때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했다. 후손 최호선이 1729년(영조 5년) 사당을 처음 건립했고 1976년에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32호로 지정됐다. 2002년 유지 성역화 사업에 따라 이곳에 새로 조성됐다.

진남정 진입로 전경. [사진=한정곤 기자]

사당과 전시관을 지나자 자동차 한 대가 겨우 빠져나갈 수 있는 좁은 산길이 소나무숲과 대숲을 끼고 또 길게 이어진다. 산책하기에 더없이 좋은 호젓한 오솔길이라는 말이 나오려다 목구멍을 타고 다시 기어 들어간다. 활쏘기를 위해 매일 이 길을 오르내려야 하는 활잡이들을 생각하면 자동차에 앉아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산인지 구릉인지 원발산 중턱쯤 양쪽 두 갈래 길로 나뉜 지점에서 진남정(鎭南亭)이라 쓰인 표지석을 만난다. 오식도에서의 2년여 와신상담 끝에 마련한 활터다.

2500여평의 부지에 들어선 2층 규모의 사정은 지난 2006년 준공됐다. 겉보기엔 콘크리트 구조물이지만 내부와 사대는 목조기와 구조의 전통양식을 갖춘, 현대와 전통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2층 사대에서 바라본 과녁은 정남향으로 서 있다. 오른쪽을 벽처럼 두른 편백나무 숲은 멀리 들판을 가로지른 바닷바람을 막고 비스듬히 경사진 왼쪽은 대나무 숲이 울창하다. 그래도 오전엔 대숲 쪽에서, 오후엔 편백나무숲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만만치 않다.

동행한 김가화 여무사는 “사대가 평지보다 높아 황학정과 같은 부사(俯射)라고 생각했는데 평지라고 해 의외”라면서 “주변 지형의 온화한 곡선이 주는 편안함 느낌 탓인지 시수도 잘 나온다”고 말한다.

진남정 사정 전경. [드론촬영=안한진]

연전길은 편백나무 숲을 따라 구불구불한 오솔길이 정겹다. 최호 장군 묘역과 그의 부친·아들·손자 묘역 뒤로 이어지는 숲길은 습기를 머문 탓인지 발끝으로 전해지는 부드러운 감촉이 확연하다. 무겁 뒤편에도 최호 장군 조상 묘역이 자리하고 있다. 간혹 과녁 뒤 가림막을 넘어 봉분에 화살이 꽂히기라도 하는 날이면 인근에 거주하며 묘역을 돌보고 있는 종손이 활터로 쫓아 올라오기도 한단다.

무겁에서 본 사정은 맞배지붕 위에 우진각지붕의 한옥 건물이 올라앉아 두 개의 반듯한 사각형이 겹쳐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외부에 노출된 현판은 없고 한옥 구조의 사대와 연결된 콘크리트 건물 벽에 걸려있다. 한눈에 봐도 세월의 더께가 두껍다. 진남정(鎭南亭)이라는 이름은 진포(鎭浦)의 남쪽에 자리한다는 의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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