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쏘기 불모지 경북 유일 조선 시대 활터…포항 권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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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쏘기 불모지 경북 유일 조선 시대 활터…포항 권무정
  • 한정곤 기자
  • 승인 2021.06.10 08: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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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터 가는 길]⑬ 왜구 침략 맞서 관(官)이 주도하고 민(民)이 참여한 무정(武亭)
포항시 흥해읍 권무정 전경. [사진=안한진]

단 한 번을 찾았는데도 어딘가 익숙하고 친숙한 도시가 있는가 하면 여러 차례 방문을 해도 갈 때마다 여전히 낯선 도시가 있다. 음식·언어 등 문화적 영향과 권위주의 시절 정치·제도권으로부터 강요당했던 후천적 교육의 산물일 것이다.

굳이 피하지 않았고 피할 이유도 없었지만 경상북도와는 좀처럼 인연이 닿지 않았다. 가본 곳이라고 해야 대구·포항·경주가 고작이다. 출장 목적 이외에 여행지로도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여행을 통해 채우고 싶었던 개인적인 욕구를 충족시킬 만한 무언가를 그곳에서는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친척은 물론 친분이 있는 지인조차 없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인지도 모른다.

활터를 찾아다니면서도 마찬가지였다. 몇 가지 조건이 충족돼야 하는데 같은 경상도인 경상남도와 달리 경상북도의 활터 대부분은 여기에 미치지 못했다. 몇 가지 조건은 100년의 역사를 기본으로 옛 사정·현판·편액의 보존·전래 여부 등이다.

사실 경상북도는 조선 시대 활쏘기의 불모지로 알려지고 있다. 조선 시대부터 전해져 오는 활터라고 해야 포항 흥해의 권무정이 유일하다. 대구를 포함하면 권무정보다 조금 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관덕정이 있을 뿐이다. 동해안을 끼고 일본과 인접해 왜구의 노략질이 잦았을 지리적 조건을 감안하면 의외가 아닐 수 없다.

특히 권무정마저 엄밀히 따지면 관(官)이 주도하고 민(民)이 참여한 활터이고 관덕정 역시 조선 시대 무과 시험제도의 하나인 도시(都試)를 행하던 도시청(都試廳)으로 출발했으니 다른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순수한 의미의 민간 활터와는 의미가 사뭇 다르다. 이는 무예를 부정적으로 여겼던 성리학자들의 사상이 민간으로까지 영향을 미쳤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드론촬영=안한진]

학계에서는 소위 주류 성리학의 계보를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정리한다. 이후 이황(1501~1570년)의 영남학파와 이이(1536~1584년)의 기호학파가 주류 성리학의 계보를 이어받는다. 시기적으로는 임진왜란 발발 직전이다. 그런데 이황과 이이에게서는 공통점이 발견된다. 활쏘기보다 투호(投壺)를 통한 신체단련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박근 서울대스포츠과학연구소 교수는 올해 5월 전통활쏘기연구회 춘계 세미나에서 발표한 ‘조선의 궁술에 나타난 명궁, 송당 박영에 대한 연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활쏘기가 도학전승 텍스트로 등장한 것은 김숙자의 학규에서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이후 김종직의 향사례로 인해 텍스트로서의 활쏘기는 전국적으로 보편화되게 된다. 그렇다면 김종직 이후에는 도학파의 전승수단으로서 활쏘기의 역할은 사라진 것일까. 소학파의 경우는 도학전승 텍스트로서의 활쏘기의 역할은 급격히 약해지게 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더 이상 텍스트로서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학』만으로도 충분히 도학전승의 텍스트를 담지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히려 퇴계의 경우 활쏘기는 더욱 관념화되어 투호라는 최소화된 양식으로 축소되기에 이르게 된다. 경(敬) 공부적 측면에서 보았을 때 효과는 동일하기 때문이다.”

비록 도학 전승의 수단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했지만 주류 성리학 계보에서 김종직 이후 활쏘기는 급격히 쇠퇴하고 급기야 이황·이이에 이르러서는 활쏘기보다 투호를 더 선호했다는 설명이다. 사림세력이 중앙의 정치 무대에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한 시기가 조선의 9대 임금 성종 때였고 물꼬를 튼 사람이 김종직과 김굉필이었다는 점에서 활쏘기 쇠퇴에 대한 또 다른 단초도 읽혀진다.

신윤복의 임하투호(林下投壺).

◇ 주류 성리학자들의 투호 보급에 밀린 활쏘기
투호는 마당이나 마루에 항아리를 놓고 화살을 던져 항아리 안에 누가 더 많이 넣는지를 겨루는 놀이로 삼국시대부터 유행했음이 여러 문헌을 통해 확인된다. 고려 시대 예종 때에는 송나라 황제가 투호를 보내주자 의식을 정하고 그림으로 올리도록 하면서 의식으로 발전한다. 다만 왕실이나 사대부 사이에서 널리 유행하지는 않았다.

그 후 원나라와의 교류 과정 속에서 일부 유학자들이 투호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유교를 국치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 전기 왕실을 중심으로 종친연이나 기로연에서 화목을 목적으로 투호 놀이가 자주 행해졌던 것으로 전해진다.

김광섭의 ‘조선 후기의 변화된 투호격과 여가 취미 양상 연구’(『대동문화연구』 제84집)에 따르면 투호 놀이가 전국으로 퍼진 것은 16세기로 보인다. 16세기는 이황의 도산서원 건립으로 비롯된 서원의 정착과 이이의 향약보급 운동, 지방사림의 중앙진출 등이 이루어진 시기다. 이황과 이이는 서원·향교 등에서 투호를 권장했다. 이황은 투호가 예악(禮樂)을 겸한 것으로 군자의 심체평정(心體平正)을 살필 수 있고 공경하는 마음을 갖도록 경계할 수 있다고 했다. 이이는 독서의 여가에 거문고 연주, 활쏘기, 투호를 즐기되 적당한 때에 하라고 했다. 이때부터 투호놀이는 서원·향교 등에서 여가시간에 하는 놀이로 정착됐고 심신수양과 덕성평가에 주안점을 두었다.

이황의 시에는 투호에 대한 이 같은 인식이 그대로 드러난다.

禮樂從來和與嚴 예악은 원래 부드러움과 엄함에 유래하니
投壺一藝已能兼 투호 한 가지 기예에 이를 모두 갖추었네
主賓有黨儀無傲 주인 손님 편 갈라도 행동이 공손하지
算爵非均意各厭 성적은 다르지만 불평하지 않는다네
比射男兒因肆習 활쏘기와 비슷하니 남자들이 연습한다
其爭君子可觀瞻 그 다툼이 군자다우니 볼만도 하지
心平體正何容飾 마음은 평안하고 몸은 바르니 꾸밈이 필요 없네.
一在中間自警潛 경이 그 안에 있으니 스스로 조심하지

이에 따라 육수화는 ‘조선 시대 사대부 투호례의 변화양상과 그 예교적 함의’(『한국교육사학』 제42권 제4호)에서 “퇴계와 율곡 또한 투호를 공부의 일환 혹은 그 연장선상으로 여겼던 만큼 지역별로 차이가 있겠지만 투호례는 사대부의 품격을 나타내는 것이었고 심신수양 혹은 향례의 하나로 거행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사대부를 중심으로 투호회가 결성되고 각종 시문(詩文)과 서화(書畫)가 등장한 것도 이 즈음이다. 그리고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비로소 투호는 대중적 문화로까지 자리 잡게 된다.

육수화는 “조선 중기까지 투호는 분명 심신의 수양과 덕성의 함양이라는 예교적인 측면이 한층 더 강조됐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이전에 비해 투호는 상대적으로 유희적인 요소가 한층 강하게 나타난다. 물론 이를 비판하며 투호례의 풍류를 고수하는 이들도 있지만 대중화될수록 그 흐름은 유희적인 방향으로 흘러갔다”고 분석한다.

이황과 이이를 중심으로 한 영남학파와 기호학파 유학자들에게 투호가 권장되고 유행하면서 도산서원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 지역에서는 활쏘기가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권무정 사대에서 습사하고 있는 배진호 접장(왼쪽부터), 최성숙 여무사, 진원대 접장, 최일규 직전 사두. [사진=한정곤 기자]

◇ “공자도 활쏘기를 했거늘…”
반면 왜구의 노략질에 대비해야 했던 경상도 목민관들은 이를 개탄하는가 하면 조정에 활쏘기 장려를 위해 무과시험 시행을 청했다. 『조선왕조실록』 등 옛 기록에는 이 같은 경상도 지방의 무예, 즉 활쏘기 경시 풍조에 대한 목민관들의 고민이 엿보인다.

『광해군일기』 130권(1618년 7월14일)에는 “올해 7월11일 경상 감사 박경신(朴慶新)이 인견할 때 ‘본도가 섬 오랑캐와 서로 접하여 있는데 사람들이 무(武)를 익히지 않아 극히 한심합니다. 위에서 혹 과거시험을 시행해 용동(聳動)시키는 일을 행하심이 어떻겠습니까?’라고 아뢴 일을 결정짓지 않으셔서 품달(稟達)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비변사로 하여금 의논하여 아뢰게 하라”고 적고 있다.

또한 조선 중·후기 최고의결기관이었던 비변사에서 처리한 사건을 기록한 『비변사등록』에는 1630년대 후반 전라도 감사였던 정세규(鄭世規·1583~1661년)가 이전 부임지였던 영남에서 ‘양반들이 무관이 될 의지가 없다’고 언급한다. 특히 그는 무과의 길을 택한 양반들은 다른 양반들에게 배척당한다고까지 했다.

과거시험을 시행함으로써 주요 과목이었던 활쏘기를 권장하려던 목민관들의 노력과 달리 오히려 무과시험에 합격한 이들이 배척당한다는 대목은 이 지방에서의 활쏘기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드론 촬영= 안한진]

결국 18세기 말 영남 지방에서 실시한 무과시험에 응시자가 적은 것을 확인한 정조는 다음과 같은 전교를 내린다.

“영남은 지역이 큰 도다. 그런데 나라의 행사인 과거에 참여하는 사람은 다른 도의 큰 고을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본도가 공자나 맹자의 고장처럼 학문이 왕성한 고을이라고 말하지 말라. 활을 쏘는 무예가 천한 것이 아니다. 공자도 활쏘기를 한 것을 보면 이를 좋아하였던 것이다. 더구나 문무(文武)를 다 같이 쓰는 것은 국가를 장구하게 보전하는 방도이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시험을 보지 않아도 본디부터 잘하는 것은 성인이고 시험을 쳐야 잘하는 것은 보통 사람이다. 묘당으로 하여금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에게 신칙하되 기한을 엄히 정하여 독촉하지도 말고 포기하게 내버려 두지도 말게 하라. 그리고 고을에 활을 잘 쏘는 사람이 있으면 수령은 감영과 병영에 보고하고 감사와 병사는 그 사람을 불러 시험을 보인 다음 재주와 무예가 뛰어난 사람은 관서 지방의 예에 따라 장계로 보고하게 하며 지체가 좋은 무변(武弁)으로서 앞으로 진취할 수 있는 능력이 넉넉한 사람은 특례로 권장하도록 하라.” (『정조실록』 39권. 1794년 2월15일)

정조의 교지에 앞서 1761년(영조37년) 경상도 흥해군수로 부임했던 김영수(金永綏)도 박경신·정세규와 같은 고민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흥해는 반만년 동안 호수였지만 동편의 곡강(曲江) 어귀가 절단된 산맥으로 호수의 물이 흘러들러 평야를 이룬 곳이다. 가뭄에도 물 걱정 없고 습기가 많아 항상 바다와 함께 흥한다 해 이름 지어졌다. 그러나 바다를 접한 변방으로 관군이 있었지만 수적인 열세로 왜구에게 주도권을 빼앗겨 사흘이 멀다 하고 쳐들어온 왜구에게 곡식을 노략질당하고 주민이 살상당하는 고통이 이어지고 있었다.

김영수 군수가 부임 첫해부터 고을 장로들로 하여금 인재를 뽑아 학문을 권하도록 학당을 세우고 활터를 세워 활쏘기를 연마하도록 한 것은 당시의 상황을 짐작케 한다. 활쏘기 경시 풍조를 개탄하거나 조정에 무과시험 시행을 재촉하는 소극적인 태도를 넘어 스스로 민병을 양성해 왜구의 침략에 대비하겠다는 적극적인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그렇게 탄생한 활터가 오늘날 권무정(勸武亭)으로 현판을 바꿔단 권무당(勸武堂)이다.

김영수 군수가 권무당 창건 2년 뒤 친필로 작성한 것으로 전해지는 ‘권무당(勸武堂記)’에는 활쏘기가 경시되고 있는 풍조를 한탄하면서 인재 양성에 있어 문무(文武)를 가릴 수 없다고 적혀 있다. 또한 바다와 접해 왜구의 침략에 대비한 무인 양성을 소홀히 할 수 없다는 창건 배경과 목적도 기록돼 있다. 특히 재주가 있어도 게을러 스스로 훈련을 하지 않아 활터를 세우고 시상제도를 마련해 동기를 부여한다며 운영 방법과 궁사들의 마음가짐에 대한 당부까지 담겨 있다.

김영수 군수의 친필 권무당기. [사진=한정곤 기자]

“옛날 택실에서 무사를 선발하되 반드시 활쏘기를 하였으니 그 활쏘기를 육예(六藝) 중 일례(一藝)로서 군자의 덕행을 관찰하는 바 지금 사례(射禮)가 쇠(衰)하고 문무(文武)의 도가 다르지만 아직 옛것을 본받아 소중히 여기는 것은 당연한즉 무릇 인재를 양육하여 그 재목을 달성하고자 하는 자는 가히 한쪽을 폐하지 못할 것이다.

하물며 우리 고을이 바다를 낀 신령한 지대로 권무(勸武)의 행정을 더욱 소홀히 못할 것이다. 불민한 내가 이 고을을 맡은 이래로 먼저 권학(勸學)을 염두에 두고 인재를 뽑아 학당에 모으고 장로(長老)에게 맡겨 일과(日課)를 가르치게 하고 세입을 감독하여 그 수요와 공급을 풍족하게 하니 삼자(三者)의 행정이 다사(多事)에게 저버리지 않았다.

이어 여가를 내어 관내의 무사들에 대한 사열을 실시했던 결과 모두 재주는 성취할 만하나 자력으로 그 게으름을 이기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다. 내가 이를 민망히 여겨 계획을 짜서 권장하게 하려니 또한 무술을 익히는 장소가 있어야 뜻이 있는 자가 연습을 할 것이며 시상제도가 있어야 재주있는 자가 분발할 것이므로 고을의 여러 인사들과 의논하여 동전 이백민(二百緡)을 협찬받아 하명자에게 명하여 각처의 사계(射契)에 보조 후 원금은 보존하고 이식(利殖)을 납부토록 하여 매월 일차 궁술대회 때 그 이자 십민(十緡)으로 우수 무사에게 시상을 하도록 하고 또 그에 마땅한 준칙을 정한 후에 비로소 사당(弓術場)을 군성(郡城)의 남쪽 들에 세우니 권무당이 앞으로 백년 동안은 유지될 것이며 이자(利子)로서 매월 시상을 하면 이로 인하여 이 고을 추향자(趨向者)의 의사에 부흥할 것이다.

낙성식을 하던 날 모든 궁사들을 모은 자리에서 내가 말하기를 무술을 연마하여 성공을 거두는 것은 제군들의 몫이니 채찍을 않아도 노력하고 권함을 기다리지 말 것이다. 또 권해도 분발하지 않으면 이는 자포자기하는 자니 내가 어찌 꾸짖겠는가. 다만 무술이란 매우 소중한 것임을 인식하고 부단히 노력해야 좋은 결과를 볼 것인즉 나는 오늘 이 일에 시작을 마련했을 따름이니 제군들은 나의 이 작은 뜻을 깊이 자각하고 유종의 미를 거둔다면 후세 사람들의 바라봄이 있으리라.”

[드론촬영=안한진]

◇논길 끝 곡강천변 현대식 사정(射亭)
여름이 코앞인데도 새벽바람은 떠나간 겨울을 잊지 못하는 듯 제법 쌀쌀하다. 흥해읍을 출발한 자동차가 주택가를 빠져나와 광활한 개활지로 들어선다. 도로 양옆으로 즐비한 논에는 이제 막 모내기를 마쳤는지 까까머리 모양의 어린 모가 물 밖으로 고개를 빼죽 내민다. 군데군데 무리 지은 비닐하우스의 풍경까지 여느 시골 못지않다. 공업도시 포항에서 이런 풍경을 만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곡강천 다리를 건너기 전 논길 오른쪽 허허벌판 멀리 기와를 얹은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조금은 위협적이기까지 한 권무정 사정이 우람한 자태를 드러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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