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래도의 신선을 부르는 활터”…순천 환선정
상태바
“봉래도의 신선을 부르는 활터”…순천 환선정
  • 한정곤 기자
  • 승인 2018.05.25 07:5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활터 가는 길]② 빗나간 화살이 부른 민원…“팔마종합운동장서 재창정”
▲ 폐쇄된 순천 죽도봉의 환선정 전경. <사진=한정곤 기자>

[활터 가는 길]② 빗나간 화살이 부른 민원…“팔마종합운동장서 재창정”

어디서 나타났는지 들고양이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사람이 살았던 흔적만 남은, 으스스한 기운마저 감도는 곳에서 갑작스럽게 출현한 들고양이는 등골을 오싹하게 했다.

피난민들이 버리고 간 마을처럼 횅한 건물 곳곳에는 온갖 잡풀과 쓰레기들이 무성했다. 들고양이에 덴 뒤라 마치 금방이라도 무언가가 나타날 것만 같은 두려움에 한발 한발 내딛는 발걸음까지 조심스러웠다. ‘귀신이 아니라 사람이 무섭다’는 옛 동네어른들의 말을 떠올려보지만 폐허 속의 정적이 가져다주는 공포는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사람이 주인이었던 곳이 이제는 주인 없는 동물과 버려진 듯한 사물로 바뀌었다.

475년의 역사를 따라 지난 세월 이곳을 스쳐간 이들만도 수천수만 명에 달했을 텐데 이처럼 폐허로 방치돼 있는 모습에서 쓸쓸함 이외에 다른 감정은 끼어들 여지조차 없었다. 빗나간 화살 하나가 초래한 엄청난 결과였다.

멀리 휘돌아 흐르는 동천(東川)의 풍경을 바라보며 이청준의 소설 『과녁』 끝부분을 떠올렸다.

“주호는 시위를 매섭게 퉁겼다. 그러나 그 두 번째 화살도 과녁을 제대로 맞히지 못했다. 아니, 그 화살은 어쩌면 어김없이 그의 과녁을 적중시킨 셈이었다. 거기 또 하나의 과녁이 있었다. 주호는 그 과녁이 지금껏 어디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서 자기의 화살을 받은 것 같았다. 그 순간 소년이 쓰러졌다. 그리고 그 쓰러지는 모습은 묘하게 아름답고 그래서 더욱 처참한 느낌이 들게 했는데 그것은 그가 쓰러질 때 먼저 두 다리를 꺾어 잠시 꿇어앉아 있는 듯하다가 이내 앞으로 폭 고꾸라진 동작의 순서 때문이었을 것이다. 혹 기억력이 좋은 사람은 그때, 어느 영화에선가 사냥꾼의 총에 번쩍 피를 뻗치며 무릎을 꿇는 듯 넘어진 새끼 노루를 생각해 냈을지도 모른다.”

전통적 아름다움을 가진 활터 북호정을 중심으로 현대 문명의 파괴성과 현대인의 위선을 비판한 소설은 어쩌면 편리함만을 앞세운 현대인들이 전통의 가치를 자신도 모르게 하나하나 지워나가고 있는 일탈에서 느끼는 쾌감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화살을 맞은 소년이 쓰러지는 모습에서 어떻게 “묘하게 아름답고 그래서 더욱 처참하다”는 감정이 일 수 있을까. 역사와 전통에 대한 의식을 상실한 모순된 형용사를 통해 일탈의 쾌감이라는 해석에 설득력을 부여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 역사를 바꾼 2015년 1월 상사대회
일요일 점심시간이 막 지날 무렵 찾은 전남 순천시 죽도봉의 환선정 진입로는 예배를 마친 개신교회 신자들 한 무리로 떠들썩했다. 이리저리 엉킨 자동차들을 피해 죽도봉 경사면을 타고 올라서자 주차된 자동차 두 대가 길을 막고, 그 뒤편으로 ‘외부인 출입금지’라는 붉은 팻말을 달고 있는 스테인리스 파이프가 가로놓여 방문객의 앞을 또 가로막았다.

▲ 입구를 가로막은 차단봉에 걸린 ‘외부인 출입금지’라는 붉은 색 팻말이 섬뜩하다. 아래는 사대 서쪽 쪽문을 쇠사슬이 채워져 있다. <사진=한정곤 기자>

팻말 옆에 내걸린 플래카드엔 “환선정 방문 안내”라는 제목으로 안전상 습사가 금지됐다며 팔마운동장 내 임시 국궁장으로 인도하는 글귀가 바람에 흩날렸다. 죽도봉으로 걸어 올라가는 환선정 사대 서쪽 쪽문인 낡은 철문에도 굳게 고정시킨 쇠사슬이 채워져 단단히 출입을 단속했다. 지난 2015년 4월부터 현재까지 환선정 입구에 버티고 선 수문장(?)들이다.

이들 수문장이 들어서기 3개월 전인 그 해 1월25일 오후 환선정은 월례 상사대회로 잔치 분위기였다. 그러나 죽도봉 환선정의 역사가 이날 또 한번 뒤바뀌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대회가 한창 무르익을 즈음이었습니다. 사대에 오른 한 사원의 실수로 화살이 과녁을 한참 빗나가면서 교회 신자 자녀로 알려진 10세 초등학교 여자아이를 스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임철순 순천 환선정 사두의 말이다. 물론 화살이 과녁을 빗나간 것은 이날이 처음은 아니었다. 이전에도 안전사고에 대한 인근 마을 주민들의 민원은 수차례 반복됐다. 2014년 10월엔 순천시의회 의원이 환선정 인근에 민가와 교회가 있어 화살로 인한 사고 위험이 크다며 이전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환선정의 역사성과 예산을 이유로 이전에 반대입장을 분명해 했던 순천시도 이날 사고 이후 더 이상 버티질 못하고 결국 환선정 폐쇄를 결정해야 했다.

3년여 방치된 죽도봉 환선정은 ‘관리’라는 단어가 더 이상 차지할 공간이 없는 ‘폐허’ 그대로였다. 입구를 가로막은 스테인리스 파이프를 넘어서자 오른쪽으로 3개의 과녁 홍심이 무심한 듯 죽도봉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웃자란 풀들이 서로 키를 재며 과녁 하단 3분의 1까지 자라 무겁은 궁사들의 발길이 끊긴 오랜 시간을 짐작케 했다.

▲ 과녁 하단 3분의 1까지 자란 풀들이 무겁을 뒤덮고 있다. <사진=한정곤 기자>

무겁 앞에서 바라본 죽도봉 중턱의 고풍스런 환선정은 오월의 푸른 숲에 잠겨 괴괴했다. 전형적인 팔작지붕에 정면 5칸, 측면 2칸의 2층으로 1층과 2층 모두 4면이 개방돼 있는 누각은 주인 잃은 티를 제대로 내고 있었다. 1층엔 먼지를 뒤집어 쓴 철제의자 몇 개가 버려져 있고 그 옆으로 각종 기물들이 널부러져 있는가 하면 2층엔 소파와 부러진 나무조각 등 온갖 쓰레기가 옛 영화를 대신했다.

松間畫閣出雲衢(송간화각출운구) 솔숲 사이 그림 누각 구름 높이 솟았거니
蓬島飛仙定可呼(봉도비선정가호) 봉래도의 나는 신선 부를 수 있으리라
酒醒夜深揮燭退(주성야심휘촉퇴) 술은 깨고 밤 깊기에 촛불 불어 꺼버린 채
坐看晴月滿平湖(좌간청월만평호) 맑은 달빛 호수 위에 가득한 걸 바라보네

이곳이 정말 사치의 풍습을 경계하고 인재의 전형을 공정히 하며 학문에 힘쓸 것을 강조한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광해군의 실정을 비판한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1563∼1633년)가 1614년 환선정에 올라 쓴 시처럼 신선을 부를 수 있는 곳인가 싶을 정도다. 환선정(喚仙亭)은 ‘신선을 부르는 정자’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현재 죽도봉 환선정과 달리 과거 자료 사진으로 본 환선정은 전혀 달랐다. 1900년대 촬영된 것으로 알려진 사진에서는 2층 누각이 아닌 정면 3칸 측면 3칸의 1층 정자 건물이다. 다만 측면에 꽤 높은 계단이 조성돼 있는 것으로 미루어 지면보다는 조금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 1900년대 촬영된 환선정. <출처 미상>

어쨌든 누각 2층에서 바라본 카메라의 파인더 창에는 오른쪽에서 흘러나오는 동천의 물줄기가 정면으로 흘러나가는 순천시내의 아름다운 풍경화 한 폭이 담겨졌다. 지금이라도 부르면 금방 달려오는 신선을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은 풍경이었다.

“성동(城東)에 봄이 와 풍경이 좋은 복사꽃 피었는데 나그네 누각(樓閣)에 오르네. 흰구름 뭉게뭉게 하늘에서 피어오르니 신선(神仙)이 나를 위하여 머물러 있는 것 같네.”

이쯤에선 기대승의 7대손으로 사헌부 지평을 지낸 겸재 기학경(1741~1809년)의 시구절도 절로 나온다.

그러나 방치된 환선정을 둘러보게 되면 오히려 조선말기 문인으로 1880년 순천부사에 임명된 김윤식(金允植: 1831~1900년)이 읊은 시가 더 적절하다.

神仙消息杳茫邊(신선소식묘망변) 신선 소식은 저 멀리 아득한데
憑檻回頭憶壯年(빙함회두억장년) 난간에 기댄 채 머리 돌려 젊은 날 추억하네
碧樹沉沉藏畫閣(벽수침침장화각) 어두운 숲은 화려한 누대를 감추고
夕陽冉冉下漁船(석양염염하어선) 뉘엿뉘엿 석양은 고깃배에서 내려왔네

▲ 환선정 2층 누대에서 바라본 순천시내 전경. <사진=한정곤 기자>

누각 앞에 사대로 사용하기 위해 조성한 1층 콘크리트건물 안에는 3년 전까지 환선정 사원들이 드나들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사두의 책상 뒤로 역대 사두의 사진이 벽을 따라 길게 내걸렸고 앞으로는 사원들이 휴식을 취했을 소파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궁방으로 보이는 곳엔 궁창과 도지개 등 기물들이 구르고 오른쪽엔 간단한 조리를 할 수 있는 식당으로 보이는 공간이 애타게 주인을 부르고 있었다.

순천시는 활터 이전 계획에 따른 죽도봉 일대 활성화를 준비해 지난해 국비 지원 사업으로 확정됐고 2019년까지 총 38억원의 사업비를 투자할 계획이다. 지난해 9월에는 시민토론회도 개최했지만 아직 구체적인 사업에는 착수하지 못하고 있다. 이제 475년 역사의 환선정은 활터로서의 기능을 잃은 채 박제화 과정만을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 팔작지붕에 정면 5칸, 측면 2칸의 2층으로 1층과 2층 모두 4면이 개방돼 있는 환선정 누각. <사진=한정곤 기자>

환선정 폐정 이후 구성된 건립추진위원회 박홍준 위원장이 건네준 연혁비 초안에 따르면 환선정은 여느 활터와 같이 형극을 길을 걸었다. 화재로 불타고 수해에 쓸려가고 민원에 쫓겨가고 불교 포교당으로 전용되는 고초가 연혁비 안에 담겨있다. 다음은 환선정 연혁비 초안 전문이다.

“환선정은 1543년 중종 38년 순천부사로 부임한 심통원이 삼산이수가 합류한 현 동외동 28번지 동천변에 강무정(환선정)과 영선각을 창건하였다. 1592년 전라감사 이광의 초청으로 이순신 장군께서 순천에 방문하여 정사를 협의하고 활도 쏘았다. 1596년 순천시 해룡면 신성포 왜성대에 진을 친 왜병의 전황을 탐지하고자 순천에 머물면서 습사도 하셨다.

이듬해 1597년 정유재란시 왜군의 침공으로 환선전이 전소되었다. 그 후 1612년 광해군 4년에 부임한 유순익 부사가 중건, 1761년 구수국 부사, 1826년 김정균 부사, 1885년 고종 22년 부임한 이범진 부사가 중수하여 친필로 환선정 비사리 현판(357×115×2cm)을 만들어 게시하였는데 1962년 8월28일 대홍수로 건물은 유실되고 현판만 남아 죽도봉 공원 환선정에 원형이 보존되어 있다.

1910년 이후 일제 강점기에 우리문화 말살정책과 환선정 부지를 약탈하여 심상소학교(일본학교) 신설비용으로 충당했기에 1935년 지방유지 김종익 외 17명이 성금을 모아 죽도봉 중록인 조곡동 278-2번지(흥륜사 자리)에 궁도장을 신설해 활용하던 중 민원으로 1983년 3월 안주섭 순천시장 재임 중 조곡동 278-25번지로 이전하여 궁도장으로 이용하였고 95대 허진명 사두 외 44명의 사원 성금과 정 자원으로 1988년 3월 환선정 복원과 영선각을 완공하였다.

2015년 1월 민원으로 조충훈 순천시장 재임 중 연향동 667-2번지 일원에 부지 17.933㎡ 건물 485.99㎡ 총공사비 45억원으로 2018년 1월 준공 이전하면서 이범진 부사의 친필 환선정 편액을 탁본으로 새겨 건물 중앙에 게시하고 선인들의 높은 뜻과 475년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후세에 영원히 전하고자 전 사원의 정성을 담아 연혁비를 세운다.”

▲ 환선정 2층에 걸려 있는 ‘환선정 연혁’ 편액. <사진=한정곤 기자>

연혁비 초안에는 없지만 1913년 환선정은 송광사와 선암사 승려들의 포교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일제가 1912년 사찰령을 반포하고 조선 임제종을 해체시키자 경운 스님이 대중포교를 위해 송광사와 함께 순천에 있던 환선정을 매입해 포교당을 건립한 것이다.

지난 2012년 11월 입적한 경운 스님은 일제시대 만해 한용운 스님 등과 더불어 임제종을 설립해 한국불교의 정통성을 지켜내고 근대한국불교의 화엄 종주로 추앙받던 스님이었다. 그러나 1950~1960년대 비구·대처간 갈등 끝에 사실상 태고종이 차지한 선암사 문중 스님이었던 탓에 근대한국불교사에서는 크게 조명을 받지 못했다. 한국불교를 이끌고 있는 조계종으로선 선암사 문중이었던 경운 스님을 추앙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계속>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