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 보고 말타기도 했다는데…『난중일기』로 본 제승당 활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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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 보고 말타기도 했다는데…『난중일기』로 본 제승당 활터
  • 한정곤 기자
  • 승인 2021.07.2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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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터 가는 길]⑮ 현 위치는 지형상 추정…한산섬 내 다른 지역 가능성도 배제 못해

[드론촬영=안한진]

통영여객선터미널을 출발한 배가 남쪽 바다를 향해 미끄러진다. 느릿느릿 소걸음과 같은 속도감이 답답하지만 선미(船尾) 수면 위로 길게 그어진 하얀 포말은 결코 느린 항해가 아니라고 항변한다. 배에 오르기 무섭게 금방이라도 목적지에 도착할 것만 같은 조바심을 여객선은 따라가지 못한다.

온몸에 달라붙는 장마철 끈적끈적한 바닷바람이 영 언짢다. 세계 4대 해전으로 불리는 한산대첩 승전일이 1592년 7월8일(양력 8월14일)이고 보면 장마철은 아니었어도 전형적인 고온다습한 기후의 한여름철이다. 판옥선의 노를 저었던 노잡이 격군(格軍)들이 흘렸을 땀을 생각하면 끈적한 바닷바람 타령은 호사에 지나지 않는다.

통영을 출발한 지 20여분쯤 멀리 부표처럼 떠 있는 거북등대가 손짓을 하고 산봉우리에 우뚝 솟은 한산대첩기념비가 반긴다. 신기루처럼 바다 안개 속에 잠긴 한산섬의 희끗희끗한 실루엣도 치맛자락 벗는 여인의 속살처럼 서서히 제 모습을 드러낸다.

전날 차멀미에 시달리다 저녁까지 거른 채 시들시들했던 이지후 여무사는 다시 살아나는데 김형완 접장은 아침 식사로 통영의 명물 졸복탕을 먹고 배에 오르기 전부터 식은땀을 흘리며 힘겨워한다. 다행히 한산섬 도착과 함께 언제 아팠냐는 듯 선착장을 앞서 빠져나간다.

거북등대 너머로 멀리 제승당이 보인다. [사진=한정곤 기자]

지난 2018년 겨울 이후 두 번째다. 계절이 바뀐 한산섬은 온통 초록 물결이다. 굴 껍데기 가득했던 갯바위투성이 맨바닥의 간조기 겨울바다와 달리 여름철 만조기 해안은 찰랑찰랑 파도 소리가 정겹다. 한쪽엔 동백나무와 적송이, 다른 한쪽으론 넓은 바다를 끼고 W자를 그리며 휘어지는 1km가량의 제승당 진입로는 그 자체로도 한 폭의 그림이다. 특히 각종 꽃들이 다투어 피는 봄철은 제승당 최고의 경치로 꼽힌다.

누군가 자전거를 타고 오면서 아는 체를 한다. 오전 9시 개장에 앞서 도착한 일행에게 문을 열어주기 마중 나온 관리사무소 직원이다. 이른 시간 출근을 강요한 민폐에 미안함과 고마움을 인사로 대신한다. 두 명의 포졸이 지키고 서 있는 대첩문을 지나 제승당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사당 충무사로 길을 재촉한다. 충무공 영정을 모시고 매년 두 차례 제향을 올리는 곳이다.

선착장에서 W자를 그리며 휘어지는 1km가량의 제승당 진입로. [사진=안한진]

◇ 자연지형 그대로 살려놓은 활터에서의 활쏘기
김형완 접장의 분향으로 묵념한 뒤 제승당유허비와 정화사업기념비를 둘러보고 삼도수군통제영의 작전지휘본부 역할을 했던 제승당을 거쳐 수루에 오른다. 멀리 한산대첩기념비와 맞은편 고동산 사이의 바닷길로 배 한 척이 들어온다. 우산을 받치듯 소나무 한 그루가 배 위로 드리워진다. 충무공도 같은 자리에 서서 같은 바다를 수차례 바라보며 적군의 동태를 살폈을 것을 생각하니 먹먹하다.

제승당은 충무공이 1593년 7월15일 여수에 있던 삼도수군 본영을 옮겨온 이후 1597년 2월26일 파직돼 한양으로 압송되기까지 3년7개월11일을 머무르며 임진왜란을 지휘했던 우리나라 최초의 통제영이다. 『난중일기』 1491일 가운데 1029일이 제승당에서 기록됐다.

[드론촬영=안한진]

제승당 뒤편 사괴석 담장 밖의 협문을 통해 활터로 향한다. 화강석으로 된 계단을 내려가 한산대첩 당시 적의 사체를 이장한 매외치가 보이는 바닷가 언덕이다. 사대 앞에는 대나무가 길게 자라 키재기를 하고 바다 방향 붉은 소나무 가지는 사방으로 가지를 늘어뜨려 시야를 과녁으로 집중시킨다. 적송 숲을 뚫고 움푹 패인, 밀물 가득 들어찬 바다 건너편 아득한 무겁엔 3개의 과녁이 사대를 바라보며 궁사를 유혹한다. 잔디 깔린 일직선 평지에서의 활쏘기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낯설 수밖에 없는 지형이다. 첨단기술까지 동원된 인위적인 활터와 자연지형을 그대로 살려놓은 활터에서의 활쏘기가 어찌 감히 비교나 되겠는가.

일찍이 공자는 인자요산(仁者樂山)이라 했고 활쏘기를 통해 자신의 덕(德)을 본다 했다. 머리로 사물을 재단하는 지혜로운 이들(지자요수(知者樂水))과 달리 넉넉하면서도 진중한 가슴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군자의 활쏘기 장소로 이곳만 한 곳이 또 있을까. 사대에 서서 바다 건너 과녁을 향해 한 시(矢)를 보낼 때마다 관중이든 불(不)이든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제승당 활터가 두 번째인 안한진 접장과 달리 김형완 접장과 이지후 여무사는 처음 접하는 선경(仙境)의 풍광에 한마디 말이 없다. 그저 넋을 잃은 듯 무심하게 무겁을 바라만 본다. 화가인 이지후 여무사는 훗날 이곳을 담은 그림을 불쑥 내밀지도 모른다.

사대에서 바라본 바다 건너편 과녁. [사진=한정곤 기자]

◇ 임진왜란 중 평균 8.7일마다 활터 나가거나 활쏘기
충무공의 『난중일기』에는 활터와 활쏘기가 언급된 날짜만 292일에 달한다. 직접 활쏘기를 한 날이 231일, 활쏘기를 구경한 날이 28일, 활쏘기를 지시한 날이 6일이다. 이 가운데 1594년 1월25일에는 우우후 이정충과 여도만호 김인영의 활쏘기 겨루기를 구경하고 직접 10순(巡)을 쏘기도 했다. 나머지는 활쏘기와는 관계없이 활터 정자에서 공무를 보거나 사람을 만난 날들이다. 또한 화살로 적을 공격한 날도 있다. 임진왜란 2539일 동안 평균 8.7일마다 활터에 나갔거나 활쏘기를 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러나 『난중일기』를 꼼꼼하게 읽은 이라면 현재의 제승당 활터에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때론 활을 쏘고 때론 구경하거나 지시하고 때론 사람을 만나 접견까지 했다는 내용들과 맞아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활터에서 말타기했다는 내용도 자주 등장하지만 말을 탈 수 있는 공간은 찾을 수가 없다. 오는 7월30일 활쏘기 국가무형문화재 제142호 지정 1주년과 8월14일 한산대첩 승전 429주년을 앞두고 제승당 활터를 찾은 이유다.

제승당 활터 정자 전경. [사진=안한진]

방문을 앞두고 황학정 김형완 접장, 안한진 접장, 이지후 여무사 등과 신원문화사 발행 『난중일기』(구인환 엮음, 2004년)와 여해 발행 『난중일기 교주본』(노순석 역, 2021년) 두 권을 비교하며 활터·활쏘기 관련 일기를 발췌하고 분석했다.

경상남도가 발행하고 제승당관리사무소가 편집한 『제승당지(制勝堂誌』 1994년 수정판에 따르면 당초 이곳에는 39.32㎡(13평) 규모의 건물이 있었다. 그러나 규모가 작고 낡아 헐어버리고 1975년 정화사업 때 현재의 콘크리트조 건물을 세웠다. 일출목 익공 주심포적인 공포양식의 건축물로 굴도리 5량의 겹처마집 구조이며 기둥은 원주로 총량을 설치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내부에는 기둥이 없는 외진 기둥으로 양측간의 중도리와 종보 사이에는 우물천정 형태로 콘크리트 슬라브를 쳤으며 천정은 연등천정이다. 지붕은 한식 토기와 중와를 사용했으며 바닥에는 박석을 깔았다.

[드론촬영=안한진]

◇ 누대 아닌 정자 건축물 기록
헐어버린 정자에 대한 용도와 구조 등의 기록은 전해지고 있지 않지만 적어도 현재 한산정(閑山亭)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 활터 정자는 『난중일기』에서 묘사되고 있는 건축물과는 확연하게 차이가 있다.

“맑다. 샛바람이 세게 불고 날씨는 몹시 추워 무척 걱정된다. 저녁나절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 공무를 보고 공문을 써 보냈다.” (1594년 2월8일)

“맑다. 새벽에 포구로 나가 진을 쳤다. 오전 10시쯤 명나라 장수 파총 장흥유가 병사와 호선 5척을 거느리고 돛을 달고 들어왔다. 곧장 바다 진영에 이르자 육지에 올라 이야기하자고 청했다. 그래서 나는 여러 수사들과 함께 활터 정자에 올라가 올라오기를 청하더니 파총이 배에서 내려 바로 왔다.” (1594년 7월 17일)

사방이 트이고 바닥에 박석이 깔린 누대(樓臺) 형태의 현 건축물과 달리 『난중일기』에서는 사람이 앉을 수 있는 방을 묘사하고 있다. 즉 앉아서 공문을 쓰고 명나라 장수와 마주앉아 이야기할 수 있는 방이 존재한 정자(亭子) 구조다. 『난중일기』 곳곳에는 이처럼 활터 정자에 앉아 공무를 본 기록이 수차례 등장한다.

수루에서 바라본 북쪽 바다. 멀리 통영을 출발한 여객선이 선착장으로 들어온다. [사진=한정곤 기자]

마루가 있는 누각(樓閣) 구조의 현 수루(戍樓) 역시 활터 정자와 같이 방이 있었던 것으로 『난중일기』에서 확인된다. 정화사업 때 사학자들의 고증을 받아 신축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수루에서 잠을 잤다는 등의 기록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저녁나절에 수루에 올라가 벽 바르는 일을 감독했다.” (1594년 7월28일)

“수루의 방을 도배했다.” (1594년 8월3일)

“아침에 맑다가 저물녘에 비가 내렸다. 충청수사와 함께 활 열 순을 쏘았다. 저녁에 장흥부사가 들어왔다. 보성군수가 나갔다. 탐후선이 들어왔다. 어머니께서는 편안하시고 아들 면은 차츰 나아진다고 했다. 고령현령과 사도첨사·적도만호가 함께 왔다가 갔다. 이날 밤 수루의 방에서 잤다.” (1594년 8월6일)

무겁에서 바라본 활터 정자. [사진=안한진]

한산정이라는 현판도 작위적이다. 『난중일기』에는 사정(射亭)이라고만 기록돼 있어 현판 없는 정자 건물로 추정된다. 현재의 현판은 정화사업 때 콘크리트 건물을 신축하며 걸었다. 창경궁 관덕정과 창덕궁 괘궁정 등 현판 없는 사정에서 한층 역사성이 강조되는 경우도 있어 굳이 현판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 제승당 곳곳에 과녁 설치
활터 지형과 관련해서는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 한 군데 발견된다.

“맑다. 아침 식사를 한 뒤 세 조방장·우후와 함께 걸어서 앞산 봉우리에 오르니 삼면이 바라보이는 앞이 막히지 않고 길은 북쪽으로 트여 있다. 과녁을 세우고 자리를 닦고 거기에 앉아 종일토록 돌아올 것을 잊었다.” (1595년 3월23일)

제승당에서 앞산은 현재 한산대첩기념비가 세워진 산과 맞은편 고동산뿐이다. 그러나 제승당 활터에서 이곳까지의 직선거리는 각각 670여 미터, 1200여 미터로 활쏘기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현재 한산정의 과녁이 있는 산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된다. ‘봉우리에서 앞이 막히지 않고 길은 북쪽으로 트여 삼면이 바라보인다’는 지형도 유사하다. 제승당으로 삼도수군 본영을 옮겨온 지 20개월 만이다.

바다 쪽 상공에서 본 제승당 활터. 왼쪽에 활터 정자 지붕과 오른쪽에 과녁이 보인다. [사진=안한진]

그러나 이날 일기 외에 현재의 활터 위치를 추정할 만한 내용은 없다. 오히려 이날 일기에서 설치한 과녁은 일회성이었을 것이라는 해석까지 가능하다. 여러 곳에 과녁을 설치하고 활쏘기를 했다는 내용들이 『난중일기』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산봉우리에 올라가 과녁을 세웠다는 일기보다 8개월 앞선 1594년 7월27일에는 “흐리고 바람이 불었다. 충청수사·순천부사와 함께 수루 위에서 활을 쏘았다”며 수루에서 활쏘기를 했다고 적었다. 수루가 사대였다면 과녁은 바다 혹은 제승당 앞마당뿐이다. 화살을 잃어버릴 것이 뻔한 바다를 향해 쏘지 않았다면 제승당 앞마당에 과녁을 설치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2년 뒤인 1596년 6월4일 일기에는 위치는 특정되지 않았지만 “맑다. 활 일곱 순을 쏘았다. 우수사가 와서 다시 과녁을 그리고 활 열두 순을 쏘았다”고 적혀 있어 충무공의 활쏘기는 굳이 활터에 국한되지 않고 제승당 경내 어느 곳이든 과녁을 설치하고 활쏘기를 했음을 알 수 있다. 집무실인 제승당 건물과 수루에서 활터까지 불과 몇 걸음만 옮기면 가능한 활쏘기를 굳이 활터 인근에 과녁까지 그려 활쏘기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드론촬영=안한진]

◇ 밀물과 썰물 때 다른 사정거리 훈련?
그동안 현재의 자리에 활터를 둔 이유로 흔히 간조와 만조 시기 달라지는 거리감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는 설명이 회자돼 왔다. 『제승당지』에도 “이곳에서는 밀물과 썰물의 교차를 이용해 활쏘기 연마를 하였기 때문에 실제 바다의 전장에 나가서 전쟁을 할 때에는 적선과의 사정거리를 잘 알 수 있었다고 한다”고 적혀 있다. 활터 정자 뒤쪽에 세워진 안내표지판에도 현재 같은 내용이 게시돼 있다.

그러나 밀물 때든 썰물 때든 같은 바다 위의 배에서 배를 향한 활쏘기인데 어떻게 거리 감각이 달라질 수 있는지 의문스럽다는 지적이 제기돼 왔다.

이지후 여무사가 과녁을 향해 만작하고 있다. [사진=안한진]

1등항해사 자격증을 보유하고 수년간 컨테이너선과 LNG선을 운항한 안한진 접장은 “누군가 충무공을 영웅시하기 위해 그럴듯하게 지어낸 말에 불과하다”며 “밀물이든 썰물이든 바닷물 수위가 함께 내려가고 함께 올라가는데 거리 감각이 달라질 수는 없다”고 말한다.

세계적인 크루즈선사의 한의사로 오대양을 다녔던 김형완 접장 역시 같은 의견이라면서도 “만약 배에서 육지로 쏘거나 육지에서 배로 쏜다면 약간의 영향은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진윤수·안진규·송일훈의 논문 ‘손다이크의 학습이론을 적용한 충무공 이순신의 활쏘기 훈련법’(한국체육학회지 2008년 제47권 제2호)에서는 “이순신은 사정을 실제 바다 위에서 싸우는 환경과 유사하도록 만든 후 그곳에서 활쏘기 연습을 했다”는 해석을 내놓는다. 사대와 과녁 사이에 바다가 있어 실제 적들과 바다 위에서 싸우는 환경을 조성한 것이라는 설명으로 거리 감각이라는 억지보다 설득력이 강하다.

이는 실전과 같은 배 위에서의 훈련이 여러 조건에 의해 제약을 받는 상황에서 불가피한 선택으로 판단된다. 한산대첩을 한 달여 앞둔 1593년 6월3일 일기에는 이 같은 상황이 적혀있다.

“새벽에 맑더니 저녁나절에 큰비가 왔다. 지휘선에 연기를 그을리기 위해 좌별선에 옮겨탔다. 막 활쏘기를 하려는데 비가 많이 내렸다. 온 배에 비가 새지 않는 곳이 없어 앉을 만한 마른 곳이 없었다. 한탄스럽다.”

[드론촬영=안한진]

◇ 말 타고 활쏘기했다는 활터와는 다른 지형
활터 위치와 관련해 가장 큰 의문점은 말을 타고 활쏘기를 했다는 기록이다. 『난중일기』에서 기사(騎射)에 대한 언급은 1596년 8월과 윤8월 두 달 중 6일에 걸쳐 나온다. 이 가운데 충무공이 직접 말을 탄 것은 하루에 불과하고 나머지 5일은 구경을 하거나 아들들을 훈련시킨 내용들이다. 아마도 윤8월10일 제승당에서 실시된 두 번째 초시(初試)를 앞두고 연습 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맑았다. 새벽에 망궐례를 행했다. 충청우후·금갑도만호·목포만호·사도첨사·녹도만호가 와서 참례했다. 저녁나절 파지도 권관 송세응이 돌아갔다. 오후에 활터로 가서 말을 달리다가 저물어 돌아왔다.” (8월1일)

“맑지만 샛바람이 세게 불었다. 아침에 제찰사에게 갈 여러 공문에 관인을 찍어 내보냈다. 조방장 배홍립과 함께 아침 식사를 하고 저녁나절에 같이 활터에 가서 말 달리는 것을 구경하고 저물 무렵에 영으로 돌아왔다.” (8월11일)

“식사를 한 뒤에 활터 정자에 가서 아들들(8월20일 들어온 아들 회·면)에게 활 쏘는 연습과 말 달리며 활 쏘는 것을 시켰다.” (8월21일)

“맑다. 활터에 가서 아들들이 말 달리고 활 쏘는 것을 구경했다.” (윤8월5일)

“맑다. 아침 식사 후에 경상수사·우수사와 함께 활터로 가서 말 달리고 활 쏘는 것을 구경하고 저물어 돌아왔다.” (윤8월6일)

“맑다. 식사를 한 뒤에 활터로 가서 말 달리고 활 쏘는 것을 구경했다.” (윤8월8일)

무겁 좌우로 협소한 해안이 보인다. [사진=안한진]

그러나 현재 제승당 활터의 지형에서는 말타기가 불가능하다. 연전길에서 본 사대와 무겁 은 가파른 절벽과 같은 지형으로 바다가 가로막고 있다. 바다에서 말타기를 했을 리 없고 사대 좌우 앞쪽 산밑의 해안이 그나마 육지인데 말을 달리기는커녕 서 있기에도 협소한 공간이다. 설사 이곳 해안에서 말타기를 했다 하더라도 오르막 경사가 심해 과녁은 보이지조차 않아 활쏘기는 더더구나 어림도 없다.

김형완 접장은 과거시험인 만큼 제승당 앞마당에 과녁을 설치하고 기사를 했을 가능성을 제기하지만 『난중일기』에는 활터에서의 말타기라고 여섯 차례나 적었다.

사실 오늘날 제승당에서 『난중일기』를 통해 충무공의 흔적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무리일 수밖에 없다. 그동안 제승당은 여러 차례의 화재와 소실로 중건과 중수가 되풀이되면서 원형이 사라진 지 오래다. 충무공 당시의 건물은 단 한 칸도 남아 있지도 않고 확인되지도 않는다. 특히 1975~1976년의 정화사업 때에는 대부분의 기존 건축물마저 헐어내고 그 자리를 현대식 공법의 재현 건축물들로 채웠다.

◇ 제승당 본영 아닌 곳의 활터 가능성 배제 못해
제승당관리사무소 소장을 역임하고 현재 이순신 리더십을 연구하며 강연 등의 활동을 하고 있는 김상영 전 소장은 “『난중일기』 내용으로 현재의 제승당을 판단하려 한다면 일치하는 곳이 단 한 곳도 없을 수 있다”면서 “활터 위치 역시 정확히 이곳이었다기보다는 협소한 제승당 경내에서 활쏘기가 가능한 지형이 현재의 한산정 자리밖에 없다는 전문가들의 고증에 따른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실제  충무공 당시 건축물은 현판이 바뀐 제승당과 수루 그리고 활터 정자가 전부다. 

특히 김 전 소장은 “선조실록 등에 삼도수군 본영이 한산섬에 존재했던 사실은 기록돼 있지만 정확한 위치는 확인되지 않는다”면서 “현 제승당은 말 그대로 지휘관들이 드나드는 사령본부일 뿐 수군들이 주둔하는 군영까지 포함한다면 한산섬 전역을 삼도수군통제영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형완 접장의 발시 후 잔신. [사진=한정곤 기자]

삼도수군의 본영이라 하기에 현 제승당의 규모가 너무 협소하다는 김 전 소장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들은 『난중일기』에서도 엿보인다. 활터에서의 말타기를 기록한 6일 가운데 “저물어 돌아왔다”는 표현이 1596년 8월1일과 윤8월6일 이틀 등장하고 8월11일에는 “저물 무렵 영으로 돌아왔다”고 적었다. 여기에서 영은 본영으로 활터가 본영 외부에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즉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활터나 활터 정자의 위치가 현 제승당이 아닌 한산섬 내 다른 지역, 즉 분영(分營)에 존재했을 개연성을 배제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이때 1595년 3월23일 현 한산정으로 추정되는 곳에 “과녁을 세우고 자리를 닦고 거기에 앉아 종일토록 돌아올 것을 잊었다”는 일기는 본영에 활터를 세운 것으로, 또한 1594년 7월27일 “충청수사·순천부사와 함께 수루 위에서 활을 쏘았다”와 1596년 6월4일 “우수사가 와서 다시 과녁을 그리고 활 열두 순을 쏘았다”는 일기는 『난중일기』에 줄곧 등장하는 활터와는 달리 본영에서의 활쏘기로 해석할 수 있다.

단 두 차례의 방문과 비전문가들의 어설픈 분석으로 제승당 활터를 함부로 규정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다만 『난중일기』 속에서 읽혀지는 전혀 다른 활터 지형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한 문제제기일 뿐이다. 『난중일기』 외에 임진왜란 당시의 제승당을 알 수 있는 어떠한 역사적 기록물이 전해지지 않는 현실에서 실체에 접근하기 위한 다양한 가능성과 개연성까지 포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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