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호성과 미지성(味知性)…운명은 모호하고 불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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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호성과 미지성(味知性)…운명은 모호하고 불확실하다
  • 한정주 고전연구가
  • 승인 2025.02.05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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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인문학] 제1장 운명에 대하여⑥
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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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주=고전연구가] 장자의 철학에는 다른 제자백가, 특히 유가의 철학에서는 보기 힘든 한자들이 자주 등장한다. ‘희미하다, 흐릿하다, 어둡다, 칠흑 같다, 캄캄하다’는 뜻의 ‘망(芒), 명(冥), 혼(昏)’ 자나 ‘알 수 없다, 알아내지 못하다’는 뜻의 ‘부지(不知), 부득(不得)’ 등과 같은 한자들이다.

그렇다면 왜 유독 장자의 철학에서는 이런 한자가 자주 등장할까. 그것은 장자가 인간의 운명 혹은 삶 자체를 희미하고 흐릿하거나 어둡고 캄캄하다고 바라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운명(삶)은 뚜렷하거나 명확하게 존재하지 않고 희미하고 모호하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희미하고 흐릿한 것, 즉 모호성이야말로 운명(삶)의 본성이라는 뜻아다.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 평생토록 악착같이 수고하면서도 성공은 기약하지 못하고 고달프게 지쳐서 곤죽이 되어도 돌아가 쉴 곳을 알지 못하니 애달프지 아니한가. 어떤 이들은 사람은 죽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사람의 육신이 죽어서 변하면 그 마음 역시 육신과 더불어 변하게 되니 몹시 애달프지 않은가. 사람의 삶이란 본래 이처럼 어두운 것일까? 아니면 나만 홀로 어둡고 다른 사람들은 어둡지 않은 것일까?” (『장자』 「내편」 ‘제물론’)

운명은 왜 희미하고 모호한 것일까. 결정되어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끊임없이 그리고 무궁무진하게 변화하기 때문이다. 변화하기 때문에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고 또한 무엇도 될 수 있지만 확실하거나 명확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더욱이 장자는 운명의 본성만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인간이 운명을 만들어가는 무대인 세계의 본성 역시 어둡고 캄캄해서 모호하다는 것이다. 세계 또한 고정불변하지 않고 끊임없이 그리고 무궁무진하게 변화하기 때문이다. 장자는 그러한 세계의 모습을 ‘곤이라는 거대한 물고기와 붕이라는 거대한 새의 우화’ 속 ‘북명(北冥) 혹은 남명(南冥)’으로 묘사하고 있다.

‘북녘의 어두운 바다’로 해석할 수 있는 북명은 거대한 물고기 곤이 살고 있는 세계이다. 그리고 ‘남녘의 어두운 바다’로 해석할 수 있는 남명은 곤이 거대한 새 붕으로 변신해 날아가는 새로운 세상이다. 여기에서 거대한 물고기 곤과 거대한 새 붕은 모두 장자 자신을 상징적으로 비유한 것이다. 거대한 물고기 곤이 사는 북명은 ‘현실 세계’를, 거대한 새 붕이 날아가는 남명은 장자가 욕망하는 이상향 다르게 말하면 ‘가상 세계’를 의미한다. 현실 세계든 가상 세계든 모두 어둡고 캄캄하다는 뜻의 ‘명(冥)’으로 묘사한 이유는 장자에게 세계라는 존재는 ‘미지와 불확실의 세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철학의 궁극적인 목적이 ‘진리 탐구’라고 할 때 여기에서 진리는 절대적이고 보편적이며 불변한 것 또한 명확하고 확실해서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주류의 철학이 추구하는 진리 탐구의 노선이다. 하지만 장자는 이러한 주류 철학의 노선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부정한다,. 장자에게 절대성, 보편성, 불변성, 명확성, 확실성은 인간의 관념이 구축한 허상의 세계일 뿐이다. 장자가 바라보는 인간과 세계는 상대적이고, 개별적이며, 가변적이고, 모호하고, 불확실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운명과 세계의 본성은 희미하고, 모호하고, 어둡고, 캄캄하기 때문에 장자는 인간의 지적 능력으로는 그것을 알 수 없거나 알아낼 수 없다고 지적한다.

“죽음과 삶, 보존과 패망, 빈궁과 영달, 가난함과 부유함, 현명함과 어리석음, 치욕과 명예, 배고픔과 목마름, 추위와 더위 등은 사물의 변화이자 천명(天命)의 작동입니다. 그것들은 밤낮으로 우리 눈앞에서 교대로 펼쳐지지만, 사람의 지적 능력으로는 그 시작을 알 수 없습니다.” (『장자』 「내편」 ‘덕충부’)

인간의 지적 능력으로는 알 수도 없고, 알아낼 수도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장자는 운명의 본성을 거스르지 말고 그것에 따르는 삶을 살라고 역설한다.. 운명의 본성이 무엇인가. 끊임없이 그리고 무궁무진하게 변화하는 것이다. 장자는 인간의 유한한 지식으로 운명의 무한한 변화를 애써 알려 하지 말고 – 알려고 해도 알 수 없으니까 – 오직 변화의 이치에 순응하는 삶을 살라고 주문한다. 변화의 이치에 순응한다는 것은 변화할 때 변화하는 것, 다시 말해 변화를 외면하거나, 회피하거나 또는 거부하거나, 부정하지 않는 삶이다. “끝없는 변화에 자신을 그대로 맡기는 삶(因之以曼衍)”, 그것이 모호하고 불확실한 운명을 대하는 장자의 태도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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