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추위가 풀려 코끗에 알싸한 공기가 와 닿지만 상쾌하다. 연못 가장자리엔 얇은 얼음으로 덮이고 후미진 산자락엔 엊그제 내린 눈이 쌓여 듬성듬성 남아 있다.
따스한 아침 햇살이 스며들어 겨울 산행을 하기에 좋은 날씨다. 그러나 산에서 변덕스런 날을 경험한 적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백두산은 하루에 일백두 번씩 날씨가 바뀐다고 하지 않던가.
청명하다가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고 비를 뿌려 도통 종잡을 수 없었던 산행의 기억들. 그것이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고 멋인 것 같다.
또한 속도전 하듯 산행은 금물이고 무리수가 통하지 않는 곳이 산이다. 4~5시간 폐부 깊숙이 질 좋은 산소를 가득 채우며 산길을 따라 ‘발맘발맘’ 걸음을 옮기는 것이 지혜로운 산행이다.
“산은 심장으로 오르고 무릎으로 내려온다”는 말이 있듯이 올라갈 땐 심장에, 내려갈 땐 무릎 관절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걸어야 한다.
모처럼 근교 산행에 나섰다. 수원과 용인에 걸쳐있는 광교산(582m)은 수원 시민들이 삼림욕이나 당일 운동 삼아 산행으로 즐겨 찾는 곳이다.
백운산·바라산·우담산·청계산으로 이어지는 한남정맥의 주봉이며 수원의 진산이다. 수원천의 발원지로 광교 호수공원을 만들고 수원시의 도심을 가로지른다.
산마루가 환하다. 산은 오전의 햇살에 일찌감치 데워지고 어느새 바람도 순해져 있다. 도심 속 광교산은 어느 쪽으로 가나 산행거리가 짧다. 산세가 부드럽고 완만해 여유 있는 산행을 할 수 있는 산책길 같은 코스다.
광교산에서 청계산으로는 한줄기로 연결돼 이른바 광청종주 25km 연계산행길을 걷는 사람들도 많다. 이 코스는 광교산(반딧불이 화장실)을 기점으로 백운산·바라산·우담산의 마루금을 타고 청계산에 이르는 코스로 약 10시간 이상 걸어야 하는 고강도 산행길이기 때문에 체력과 인내심이 필요하다.
광교산 등산 안내도에 10개의 코스가 실려 있다. 오늘 산행은 상광교 다슬기 화장실→사방댐→약수터→억새밭→노루목→시루봉(582m)→토끼재→사방댐→버스종점(6.0km)으로 택했다. 약 3시간 코스다.
상광교 버스종점에서 사방댐을 지나 잘 정비된 산책로를 따라 약 500m 지나면 길이 나눠진다. 왼편 길은 절터 약수터 쪽으로 걸어 억새밭 방향으로 올라가는 길이고 오른편 길은 노루목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절터 방향으로 조금 가파른 오름길이 길게 이어지며 절터 약수터를 앞두고 데크계단이 설치돼 있다. 절터라고 하지만 어디가 절터인지 흔적은 없다. 잡목과 덤불로 우거져 있고 약수터 옆의 운동기구에 매달려 입김을 내뿜는 아저씨 한 분만 눈에 띈다.
산행시작 40분 만에 절터를 지나 천천히 고도를 높여 억새밭으로 향한다. 역시 데크계단길로 올라 15분 거리의 억새밭 삼거리에 닿는다. 긴 휴게의자와 한 켠에 터줏대감처럼 앉아 있는 돌무더기가 눈에 들어온다. 간절한 소망으로 포개져 있는 틈에 나도 하나 보태본다.
억새밭에서 이정표는 노루목 0.7km, 시루봉(정상) 1.1km라고 알려준다. 북서릉 방향 정상으로 오르는 테크 능선길 전면엔 송신탑이 하늘 높게 세워져 있고 느릿한 걸음으로 25분 만에 노루목 대피소에 도착한다.
평일이지만 제법 등산객이 많고 넓은 산길이 주는 분위기는 호젓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곳에서 시루봉 정상까진 400m가 남는다.
광교산의 정상 시루봉은 주능선에서 옆으로 조금 비켜나 있다. 산행 들머리인 버스종점에서 3.3km, 비교적 짧은 1시간30분 만에 환한 정상을 내놓는다.
정상엔 용인시에서 세운 정상 표지석이 설치돼 있고 목재 데크로 넓게 짜놓아 길손들의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왼쪽으론 관악산, 오른쪽엔 청계산 망경대와 멀리 북한산이 희미하게 조망되며 성남시가지 뒤로 남한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정상에서 사위를 조망하고 산행식으로 가져온 샌드위치와 커피는 간단하게 요기를 마친다. 시루봉에서 토끼재 방향으로 하산길을 잡고 줄곧 내리막길로 내려서서 0.8km 약 20분 만에 토끼재에 닿았다.
토끼재에서 상왕교 등산안내소까지는 1.6km. 우측 440계단으로 쉼 없이 내려와 반딧불이 화장실까지 3시간 만에 걸음을 멈춘다.
광교산이 명산의 반열은 아니지만 얼어붙은 겨울산 비탈에서 인동(忍冬)하는 겨울나목의 긴 침묵을 듣는다. 묵중한 겨울산의 모습은 자연의 모든 게 충족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산길을 걸어보면 자신의 몸을 제대로 느낄 수 있으며 목표를 가지지 않고 걷는 것은 더욱 여유롭고 즐겁다. 텁텁한 막걸리 한 사발에 뜨거운 국밥으로 몸을 덥히고 배낭을 내려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