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무와 정약용의 세검정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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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무와 정약용의 세검정 풍경
  • 한정주 고전연구가
  • 승인 2021.01.11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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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무 詩의 온도](57) 세검정
겸재 정선 '세검정도'
겸재 정선 '세검정도'

서상수가 부는 퉁소 소리를 들었다. 두 사람이 더불어 합주를 한다. 세 사람 모두 퉁소로 나라 안에서 이름난 이들이다. 해질녘 여섯 시인은 콸콸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면서 시를 읊었다.

쌍 퉁소 소리 가냘프게 새어 나오니      雙簫韻始纖
개울가 복사나무 뒤늦게 핀 꽃 간들간들  溪桃裊餘花
세 퉁소 소리 물 뚫고 메아리치니        三簫穿水響
그윽한 상념 견딜 수 없이 일어나네      幽想不勝遐
무수한 돌 들썩들썩 요동치려 하고       萬石欲動搖
우뚝 솟은 세검정 한층 더 높아졌네      危亭倍嵯峨
『영처시고 2』 (재번역)

[한정주=고전연구가] 세검정은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던 곳이다. 자연 풍경도 아름다웠지만 세검정 앞개울의 물소리와 물줄기가 장관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세검정 앞개울의 물소리와 물줄기가 연출하는 장관 중 최고의 장관은 무엇이었을까? 여기 이덕무와 정약용의 증언이 있다.

이덕무는 이 시에서 ‘해질녘 콸콸 흐르는 물소리’가 장관이라고 했고 정약용은 산문 ‘유세검정기(遊洗劍亭記)’에서 ‘소나기 내릴 때 폭포처럼 사납게 굽이치는 물줄기’가 장관이라고 했다.

“세검정이 자랑하는 빼어난 경치란 소나기가 내릴 때 폭포처럼 사납게 굽이치는 물살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비가 막 내리기 시작하면 대개 수레를 적셔가며 교외로 나가려 하지 않고 비가 갠 후에는 계곡의 물 역시 이미 그 기세가 꺾이고 만다. 이 때문에 세검정은 도성 근처에 있는데도 성 안 사대부 가운데 정자가 자랑하는 빼어난 경치를 만끽한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신해년(정조 15년) 여름날 나는 한혜보를 비롯한 여러 사람과 남부 명례방(明禮坊: 도성 구역 명칭)에 모였다. 술이 여러 잔 돌고 나자 후덥지근한 열기가 확 올라오면서 먹구름이 잔뜩 끼고 천둥소리가 은은하게 울렸다. 이 광경을 보고 나는 벌떡 일어나 ‘소나기가 내릴 징조네. 함께 세검정에 가 보지 않겠나? 만약 가지 않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한꺼번에 벌주(罰酒) 열 병을 주겠네’라고 말했다. 그러자 모두 ‘이를 말인가!’ 하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마부를 재촉해 창의문을 나서자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는데 주먹만큼 컸다. 더욱 힘껏 말을 달려 세검정 아래에 당도하니 수문(水門) 좌우의 계곡에서는 고래 한 쌍이 물을 뿜어내듯 이미 물줄기가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우리 일행의 옷소매 역시 빗방울에 얼룩졌다.

세검정에 올라 자리를 펴고 앉았는데 난간 앞 수목은 이미 미친 듯 흔들리고 한기가 뼛속을 파고들었다. 이때 비바람이 크게 일더니 산골짜기 물이 갑자기 쏟아져 내려 눈 깜짝할 사이에 계곡은 메워지고 요란하게 물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모래가 흘러내리고 돌이 굴러 물속에 마구 쏟아져 내리면서 사납게 굽이치는 물살이 세검정 주춧돌을 할퀴고 지나갔다. 그 물살의 기세가 웅장하고 소리가 맹렬해 정자의 서까래와 난간이 진동하자 모두 오들오들 떨며 불안해했다. 내가 ‘어떠하냐?’고 묻자 모두들 ‘이루 말할 수 없이 좋구나!’라고 대답했다.”

이덕무의 시와 정약용의 산문은 세검정의 실경(實景)을 묘사한 진경 시와 진경 산문의 걸작이라고 하기에 손색이 없다. 이렇듯 이 시대에는 진경 시와 진경 산문이 쌍벽을 이루며 함께 성장하고 있었다.

어쨌든 필자도 요즘도 가끔 해질녘이나 소나기 내리는 날 세검정을 찾아 이덕무의 시와 정약용의 산문을 읊곤 한다. 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순간만큼은 시간을 초월해 이덕무와 정약용과 한 공간에 함께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곤 한다.

왜 그럴까? 필자의 정서가 이덕무의 흥취와 나의 감정이 정약용의 정취와 교감하기 때문이다. 비록 짧은 순간이지만 그때 나는 이덕무가 되고 혹은 정약용이 된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정서와 감정을 교감하는 능력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특권이 아닌가? 그러한 특권은 아무리 누린다고 해도 그 어떤 사람에게도 또한 그 어떤 자연에게도 해가 될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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