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누각에서 이름난 정원 내려다보며 名園高閣俯
풍광을 빠짐없이 살펴보네 領略盡煙光
새는 맨 처음 낳은 새끼가 크고 鳥大頭番子
윤달의 향기 숲에 가득하네 林饒閏月香
손님과 주인 시와 그림 품평하고 詩圖賓主品
꽃이 피고 지며 비가 오고 갬을 살펴보네 花曆雨晴量
이 밖에는 모두 번뇌일 뿐 是外渾煩惱
서로 어김없는 이야기 길고 길구나 無違晤話長
형과 동생 모두 밝고 밝아 昆季皆娟好
서로 찾는 마음 백 번도 싫지 않네 百回不厭尋
술로 들인 정성 가랑비 이루고 酒功成小雨
꽃에 깃든 정령 무성한 그늘로 돌아오네 花魄返繁陰
괴상스러운 구리 거죽 푸른빛의 돌이요 祕詭銅靑石
아름다운 풍류 거무스름한 주황빛 새로다 媄韶褐色禽
그대의 말 한마디 경청하니 聆君一轉語
아름답게 우는 가릉새 소리보다 좋구나 勝似迦陵音
『아정유고 2』 (재번역)
소완정을 찾아서
휘파람 불며 낙엽 지는 언덕 오르니 舒嘯聊登落木臯
맑은 서리 누각 그림자 더 높아졌네 淸霜樓閣影初高
짙게 물든 석양빛 화단에 머무르고 夕陽生色留花埒
무정한 가을 물결 돌구유에 끊어졌네 秋水無情斷石槽
학 기르는 동산 식구 하나 더 늘었고 養鶴園中添一口
손님 초대한 자리 살찐 돼지고기 차렸네 招賓座上設三毛
한 해 저무는 때 근심 많다 한탄 말라 休嘆歲暮多愁緖
하늘 우리에게 한가로운 시간 넉넉히 주었네 天與優閒餉我曹
『아정유고 3』 (재번역)
[한정주=고전연구가] 소완정은 이서구가 스스로 붙인 자신의 서재 이름이다. 서상수의 관재와 더불어 이덕무와 그 벗들의 가장 중요한 모임 장소 중 하나였다.
특히 이서구는 한시 4가 중의 한 사람으로 ‘백탑시사’의 주요 멤버였다. 이 때문에 이덕무의 시 가운데에는 소완정에서 지은 시가 아주 많다.
소완정은 이덕무와 그 벗들의 독창적이고 혁신적인 시가 탄생한 18세기 조선의 핵심 문화 공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소(素)’라는 한자는 흰 바탕의 편지나 서책을 뜻한다. 만 권에 육박하는 책을 지닌 장서가로도 이름을 떨친 이서구는 서재에 가득 쌓인 책들을 완상(玩賞)한다는 뜻에서 서재의 이름을 ‘소완정(素玩亭)’이라 붙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서구의 스승 박지원은 방안 가득 책을 쌓아두고 그 가운데 파묻혀 사는 이서구를 꾸짖으며 이렇게 말했다.
“지금 자네의 책은 마룻대까지 가득찬 것도 모자라 시렁까지 꽉 채우고 있네. 전후좌우를 둘러보아도 책이 아닌 곳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네. 자네는 물건을 찾아 헤매는 사람을 보지 못했는가? 앞을 보고 있자니 뒤를 보지 못하고, 왼쪽을 돌아보자니 오른쪽을 놓치게 된다네. 왜 그렇겠는가? 방 한가운데 앉아서 자신의 몸과 사물이 서로 가리고, 자신의 눈과 공간이 서로 너무 가까이 있기 때문이라네. 차라리 자신의 몸을 방 바깥으로 옮겨두고 들창에 구멍을 뚫고 엿보는 것이 더 낫네. 그렇게 한다면 한쪽 눈만 가지고서도 온 방의 물건들을 모두 살필 수 있네."
방안 가득 책을 쌓아놓고 어떤 책을 찾으려고 하면 한쪽 방향의 시야에 갇혀 책을 찾을 수 없다. 오히려 방안을 벗어나 방 바깥에서 방안을 들여다보면 사방을 살펴볼 수 있기 때문에 어떤 책이 어디에 있는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박지원의 가르침은 어떤 가치와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여기에는 시선을 전환하고 관점을 옮겨야 비로소 볼 수 없는 것들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방안, 곧 내부의 시선과 관점에 갇혀 있으면 편협해진다. 방 바깥, 곧 외부의 시선과 관점을 통해 방안, 곧 내부를 보아야 내부를 더 폭넓게 볼 수 있게 된다. 여기에는 “내부에 머무르지 말고 외부로 시선을 옮겨라”는 메시지가 새겨져 있다.
조선에 머무르지 말고 중국(청나라)으로 시선을 옮겨야 조선을 더 잘 볼 수 있다. 유학에 머무르지 말고 서학(西學)으로 시선을 옮겨야 유학을 더 잘 볼 수 있다. 성리학에 머무르지 말고 양명학으로 시선을 옮겨야 성리학을 더 잘 볼 수 있다. 조선에 머무르지 말고 일본으로 시선을 옮겨야 조선을 더 잘 볼 수 있다. 중화에 머무르지 말고 오랑캐로 시선을 옮겨야 중화를 더 잘 볼 수 있다. 인간의 시선에 머무르지 말고 자연 만물로 시선을 옮겨야 인간을 더 잘 볼 수 있다. 양반사대부에 머무르지 말고 노비로 시선을 옮겨야 양반사대부를 더 잘 볼 수 있다.
박지원의 ‘소완정기’에서는 중심과 주변의 이분법을 전복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내부와 외부의 이분법을 해체하는 새로운 시대의 철학을 읽을 수 있다. 소완정에 모여 앉은 이덕무와 그 벗들이 박지원의 ‘소완정기’를 화제 삼아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을지 상상할 수 있지 않은가?
이러한 철학 때문에 이덕무와 그 벗들은 중화를 넘어 오랑캐로 시선을 옮길 수 있었고, 유학을 넘어 서학으로 시선을 옮길 수 있었고, 조선을 넘어 청나라와 일본으로 시선을 옮길 수 있었고, 성리학을 넘어 양명학으로 시선을 옮길 수 있었고, 인간을 넘어 자연 만물로 시선을 옮길 수 있었고, 양반사대부를 넘어 노비로 시선을 옮길 수 있었다.
시선의 전환과 관점의 변환, 그 지점이 바로 18세기 조선의 문장 혁신과 지식 혁명의 진원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