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은 유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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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은 유령
  • 한정주 고전연구가
  • 승인 2020.11.23 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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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무 詩의 온도](53) 중양절 마포에서 박제가와 함께

마당 흙은 말라 기와와 같고                  場土乾如瓦
가로 길쭉한 말구유에                        橫長馬槽腹
휙휙 깃 소리 내며                           拍拍生羽音
머리 위로 볏단이 날아다니네                 頭邊飛禾束
강 따라 나부끼는 말 등에                    聯翩江馬背
두 섬의 연안 소금 실려 있네                 二石延安鹽
강가 밭에 무 풍년 들어                      渚田豊萊葍
올해 겨울 김장 참 값싸겠네                  今冬葅眞廉
비에 헐린 담은 누구의 집인가                誰家雨壞垣
어린 단풍나무 반드르르 어여쁘네             穉楓姸膩膩
온통 푸른 빛 속에서 눈이 번쩍 뜨인 것은     眼醒蔥蒨中
붉은 밀랍 종이와 비슷하기 때문이네          爲似紅蠟紙
국화는 옮겨 심어도 뿌리는 몰라              菊移根不覺
아침에 봉오리 낮 되면 꽃피네                朝蕾午敷英
중양절에 마시는 술잔 연이으니               點綴重陽飮
노란빛 뱃속에 스며 향기가 나네              黃輝沁胃馨
『아정유고 1』 (재번역)

[한정주=고전연구가] 음력 9월9일 중양절의 생활 풍속과 풍경을 읊은 시다.

이덕무는 일상생활 속의 하찮고 보잘것없고 사소한 것들의 가치와 의미를 발견해 시로 묘사하는 탁월한 재주와 지혜를 갖춘 사람이었다.

우주 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각자 나름의 존재가치와 존재의미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덕무는 모든 사물에 깊은 관심을 갖고 세심하게 관찰했다.

이 때문에 이전 시대 혹은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없던 무수한 존재들이 이덕무에 의해 발견되고 글로 표현되면서 그 존재감을 드러내게 되었다.

아무리 자주 보고 지나다녀도 그 존재와 공간의 가치와 의미를 깨닫지 못하거나 혹은 발견하지 못한다면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은 유령’ 같은 것에 불과하게 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자신이 미처 깨닫지 못했거나 발견하지 못했던 존재와 공간이 지닌 가치와 의미를 우연치 않게 깨닫거나 새삼 발견하게 되면 이전까지 아무런 가치와 의미가 없던 것이 비로소 존재가치와 존재의미를 갖게 된다.

그렇듯 우리 생활 주변에는 보고도 보지 못하고, 듣고도 듣지 못하고, 말해도 알지 못하고, 생각해도 깨닫지 못하는 자신의 어리석음 때문에 그 존재가치와 존재 의미조차 모르고 지나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때마다 드는 생각. “아! 눈뜬장님이라는 말이 바로 이런 경우로구나. 내가 바로 눈뜬장님이었구나. 알아도 아는 것이 아니었구나. 알아도 알아도 ‘앎’이란 끝이 없는 것이구나!!”

‘앎’이란 단어 앞에서 겸손하고 겸허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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