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 벽 공허한 벌레 소리 절로 괴롭고 四壁蟲聲空自勞
아득한 강 기러기 구름 높이 날아가네 江鴻漠漠入雲高
서늘한 등잔불 굴원의 『이소』 읊다가 寒燈誦咽靈均賦
거대한 숫돌에 일본 칼 갈아보네 大石磨翻日本刀
이 세상 어찌 밭갈이 낚시질하다 늙겠는가 天地寧爲耕釣叟
영웅 본래 개 닭 무리 되는 것 원치 않네 英䧺不願狗鷄曺
재주 뛰어난 남아 예부터 광채 숨기는 일 많고 奇男終古多鞱彩
안개 속 표범 깊은 숲 털 아낄 줄 아네 霧豹深林知惜毛
『영처시고 2』 (재번역)
달과 별이 환한 밤, 박제가의 추실(秋室)에서
짙게 드리운 어둠 속 개울가 누대 올라 暝色戎戎赴磵樓
비 멎자 달 비낀 가을 하늘 즐겁게 바라보네 雨歸欣覯月橫秋
깊고 맑은 물가 풍경 수염 눈썹 예스럽고 鬚眉忽古泓渟境
아득하고 그윽한 유람 탕건 의복 해맑구나 巾服仍淸莽渺遊
굴원을 이야기 하니 속물은 아니고 譚到靈均非俗物
왕희지를 생각하니 저절로 명사(名士)의 무리네 想來逸少自名流
서늘한 바람 일어난 후 처음 그대 만났으니 涼生以後初逢汝
풍미는 모름지기 술 속에서 구해야지 風味須於酒裏求
『한객건연집』 (재번역)
가을밤 붓을 잡고
남자는 예부터 가을 맞으면 슬퍼 男子逢秋自古悲
가을바람 달빛 함께 서재에 들어오네 商飆吹月入書帷
풀뿌리 이슬 떨어지고 벌레 소리 요란하니 草根露滴蟲聲動
어지러운 내 마음 깊은 밤 굴원의 『초사』 읽노라 亂我深宵讀楚辭
『영처시고 2』 (재번역한 것임)
[한정주=고전연구가] 이덕무와 박제가가 가장 좋아한 옛 시인은 굴원이다. 굴원은 춘추전국시대 초나라의 정치가이자 시인이었다. 높은 학문과 뛰어난 정치적 식견 그리고 탁월한 문학적 재능을 모두 갖춘 초나라의 인재였다.
그러나 그는 당시 최강대국인 진나라의 위협 앞에 풍전등화의 신세나 다름없는 초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부국강병책과 사회개혁안을 건의했다가 간신들의 참소와 중상모략으로 추방당하고 만다.
그 후 굴원은 자신의 충성심과 결백함을 끝내 보여줄 수 없게 되자 돌을 안은 채 멱라강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했다.
굴원이 죽은 지 50여년 후 초나라는 진나라에게 멸망당했다. 이러한 까닭에 굴원은 예부터 절의지사(節義志士)를 상징하는 인물로 알려져 왔다.
굴원이 초나라를 걱정하는 우국충정(憂國衷情)과 간신배들에 대한 비분강개한 심정을 담아 읊은 시가 『이소(離騷)』다. 『이소』는 ‘초나라의 시’라고 해서 『초사(楚辭)』라고도 부른다.
박제가의 호 ‘초정(楚亭)’은 굴원의 『초사』에서 ‘초’ 자를 따와 지은 것이다. 굴원의 우국충정과 비분강개함을 좇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굴원의 마음을 좇아 조선을 개혁하고 백성을 구제해 부국안민의 뜻을 이루려고 했던 것, 젊었을 때부터 이덕무와 박제가가 굴원과 그의 시 『이소』(혹은 『초사』)를 사랑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