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적 삶의 기준·규범에서 벗어난 기호·취향의 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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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적 삶의 기준·규범에서 벗어난 기호·취향의 추구
  • 한정주 고전연구가
  • 승인 2020.12.07 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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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무 詩의 온도](54) 윤회매(輪回梅)

나는 독창적으로 밀랍을 녹여 매화를 만들었다. 꽃술은 털로 만들고 꽃받침은 종이로 만들어 푸른 가지에 붙였더니 맑고 아름다워 사랑스러웠다.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밀초 눈물 금곡원에서 제나라 왕경 원망하는 듯  蠟啼金谷怨齊奴
불꽃 살라 눈처럼 밝은 살결 다 태우네          爨盡輕明雪樣膚
찬찬히 보니 누대 아래 떨어진 꽃 같으니        試看如花樓下墜
녹주의 원통한 빚 범부에게 갚는구나            綠珠寃債報凡夫
벌집의 벌들 전생의 인연인 듯                  蜂衙夙結轉輪緣
쌍쌍히 나타나니 자매처럼 어여쁘네             現了雙雙娣妹姸
만약 진짜 매화 보게 한다면                    若使眞花開着眼
맑고 신선한 기운 너무 닮아 어여삐 여기네      澄鮮一氣肖孫憐

유득공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촛농 떨어져 쌓이니 봄밤 기나길고              燭淚成堆芳夜長
뒤집힌 산호 얼어 만 가지 노랗네               倒珊瑚凍萬條黃
왕가 자제 재주 없고 재치 없어                 王家子弟無才思
매화 만들지 않고 봉황 만드네                  不鑄梅花鑄鳳凰
밀랍 매화 어여뻐 늦은 봄 깨끗하니             蠟花姸淨媚餘春
석영(石英)의 아름다움 이보다 못하리           英石輕盈恐未眞
한나라 무제, 임포의 치절(痴絶) 상상하니       漢武林逋痴絶想
매부인, 이부인에게 비교할 만하네              梅夫人比李夫人

박제가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꽃 만들고 밀 빚는 모습 보았는데               目擊生花釀蠟時
문득 매화 피어 가지에 올랐구나                旋看梅發倏騰枝
윤회의 변화 깨달았거늘                        風輪幻化從渠覺
전생, 내생 믿지 않는다면 나는 누구인가        不信他生我是誰
벌이 꿀 채집 전 나도 그와 같았는데            蜂之未採我如斯
윤회의 중간 어찌 되었는데 알 수 없네          展轉中間了不知
동쪽 정원 꽃밭 속 채집 기억하니               記取東園香樹裏
모년 모월 모일 바람 불 때 만나세              某年月日遇風時

윤회매(輪回梅)는 벌이 꽃을 채집하여 꿀을 만들고 꿀이 다시 밀랍이 되고, 밀랍이 다시 꿀이 되는 변화가 마치 불교의 윤회설(輪回說)과 같기 때문이다.

내가 일찍이 윤회매를 만드는 편리한 방법을 엮어 『윤회매십전(輪回梅十箋)』을 저술하였다. 『윤회매십전』을 보지 않는다면 위 시의 오묘한 이치를 알지 못할 것이다.
『청비록 4』(재번역)

[한정주=고전연구가] 유학과 성리학이 지식인의 내면을 지배하고 있던 조선에서는 유학과 성리학적 삶의 기준과 규범에서 벗어난 기호와 취향의 추구는 일탈 행위라고 여겼다.

당대 지식인들이 금과옥조로 여겼던 완물상지(玩物喪志)라는 말은 곧 좋아하거나 아끼는 사물에 마음을 빼앗겨 탐닉하는 것은 선비의 뜻을 잃어버리는 어리석고 몹쓸 짓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매화라고 다르겠는가? 하지만 이덕무와 그 벗들은 자신의 기호와 취향을 드러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매탕’이라고 부르며 스스럼없이 매화에 미쳤다고 자처했다. 오히려 1년 내내 즐길 수 있는 인조매화인 윤회매를 만들어서 자신들의 기호와 취향을 전파하려고 했다.

더욱이 윤회매를 거리낌 없이 주변 사람들에게 돈을 받고 판매했다. 박지원의 연암집』에 남아 있는 편지를 보면 그가 어린 종과 함께 손수 윤회매를 만든 다음 아는 사람에게 돈을 주고 살 것을 권하는 내용이 나온다.

“나는 집이 가난하고 꾀가 모자라서 생계를 꾸리는데 탄식만 할 뿐입니다. 손재주가 교묘한 어린 종을 따라 나 역시 때때로 ‘윤회매’를 만든답니다. ‘윤회매’라고 부르는 까닭은 꽃이 밀랍이 되었다가 밀랍이 다시 꽃이 되는 이치가 불가의 윤회설과 같기 때문입니다.

비록 땅에 박혀있지 않은 꽃이지만 자연의 정취를 만끽하기에 부족하지 않습니다. 그윽한 향기는 없지만 황혼의 달 아래 눈 덮인 산속의 고상한 선비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답니다.

나는 그대에게 매화 한 가지를 팔아서 그 값을 매기고 싶습니다. 만약 가지가 가지답지 못하거나 꽃이 꽃답지 못하거나 꽃술이 꽃술답지 못하거나 책상 위에 놓아도 빛이 나지 않거나 촛불 아래 그림자가 없거나 거문고와 더불어 기이한 흥취가 나지 않거나 시 속에 넣어도 운치가 없다면 내 요청을 영원히 물리친다 한들 원망하는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특정한 사물에 마음을 빼앗겨 탐닉하는 것도 비난받을 일인데 하물며 책을 읽다가 굶어죽을 망정 재물에 초탈해야 할 선비가 직접 나서 인조 매화 장사를 하다니….

이덕무와 그 벗들이 얼마나 당대의 도덕 기준과 윤리 규범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롭고 활달하고 호방한 삶을 추구했는가를 엿볼 수 있는 멋진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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