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세 가지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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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세 가지 즐거움
  • 한정주 고전연구가
  • 승인 2020.12.28 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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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무 詩의 온도](56) 마포에서

푸른 갈매기 따라 가고 또 가니               行逐靑鷗去去邊
가죽나무 뜰 배만큼 큰 달                    樗庭好値月如船
가슴 앞 아득한 강 눈 쌓였고                 襟前廣漠江圍雪
눈 아래 평평한 나무 연기 피어오르네       眼底平鋪樹出煙
옛 병풍 매화 그림 지나간 일 말하고         古屛梅査譚往事
가을 울타리 국화송이 어린 시절 떠오르네  秋籬菊瓣記童年
좋은 밤 무슨 복으로 선배 모시고            良宵何幸陪先輩
항아리 가득 술 데우고 고요히 마주앉았네  煖酒盈壺對肅然
『아정유고 1』 (재번역)

길 가는 도중 장난삼아 짓다

삼사 년 전엔 한낱 포의(布衣)의 선비         三四年前一布衣
찰방(察訪) 낮은 관직이나 빠른 승진이네     郵丞雖冷驟遷稀
준마와 푸른 일산, 행장 차렸으니             行行駿馬靑靑傘
가는 곳마다 그늘진 강가 옛적 낚시터로세    到處淮陰舊釣磯
『아정유고 4』 (재번역)

복날 여러 벗들과 삼청동 어느 집 석벽 아래서 피서하며

창문(倉門)에서 잘 익은 붉은 복숭아 사와          津紅桃顆買倉門
슬슬 거닐며 먹다가 어느덧 산기슭                  行噉逍遙抵岳根
아름드리나무 그늘 서늘해 잠잘 만하고             佳樹蔭衣涼可睡
그윽한 샘 말없이 고요히 둘러앉았네               幽泉圍座澹無言
두 그루 석류 햇빛 받아 서로 아름답게 비추고      雙榴日媚光相照
비둘기 무리 더위 피해 제각각 날아가네            群鴿炎逋各自飜
마을 노인 병서(兵書) 읽고 아이는 채소밭 물주니  邨叟讀兵兒灌圃
삼청동 모든 일 좋은 풍속 남아 있구나              三淸事事好風存
『아정유고 1』 (재번역)

[한정주=고전연구가] 정약용은 사람의 세 가지 즐거움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어렸을 때 뛰놀던 곳에 어른이 되어 오는 것이 한 가지 즐거움이고, 가난하고 궁색할 때 지나던 곳을 출세해 오는 것이 한 가지 즐거움이고, 나 혼자 외롭게 찾았던 곳을 마음이 맞는 좋은 벗들과 어울려 오는 것이 한 가지 즐거움이다.”

이덕무는 10대 시절을 대부분 마포에서 보냈다. 마포는 삼호(三湖) 혹은 마호(麻湖)라고도 불렀다. ‘마포에서’는 사람의 세 가지 즐거움 중 첫 번째 즐거움, 곧 ‘어렸을 때 뛰놀던 곳을 어른이 되어서 찾았을 때 느끼는 즐거움’을 읊은 시다.

이덕무는 39세 때 규장각 검서관이 되면서 비로소 가난하고 궁색한 포의(布衣)의 신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길 가던 도중 장난삼아 짓다’는 규장각 검서관이 되고 난 후 예전에 하는 일 없이 낚시하던 곳을 지나가다가 문득 떠오르는 상념을 묘사한 시로 사람의 세 가지 즐거움 중 두 번째 즐거움, 즉 ‘가난하고 궁색할 때 지나던 곳을 출세해 지나가는 즐거움’을 읊은 것이다.

서자 출신의 이덕무는 관인방(寬仁坊) 대사동(大寺洞) 본가에서 태어났지만 집안이 가난하고 궁색한 탓에 어렸을 때부터 외숙, 계부(季父), 이모부 댁을 임시 거처 삼아 옮겨 다니며 살아야 했다. 이 때문에 그는 벗다운 벗을 사귈 만한 여유를 가질 수 없었다. 그러다가 26세 되는 1766년 5월27일 다시 자신이 태어난 관인방 대사동으로 이사했다.

관인방 대사동은 지금의 인사동으로 이덕무와 그 벗들의 주요 활동 무대였던 백탑과 북촌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다. 관인방의 ‘인(仁)’ 자와 대사동의 ‘사(寺)’ 자를 취해 지은 이름이 인사동(仁寺洞)이다.

삼척동은 인사동의 지척 거리에 있다. 지금은 수려한 풍경이 많이 훼손되었지만 이덕무가 살던 당대에는 한양 도성 안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승경(勝景)이었다. 이덕무는 마음이 답답하거나 울적할 때면 시름을 달래기 위해 홀로 삼청동을 자주 찾았다.

그러나 ‘백탑시사’를 맺어 사람들과 활발하게 교류한 이후로는 여러 벗들과 어울려 삼청동을 찾아 시 창작을 했다. ‘복날 여러 벗들과 삼청동 어느 집 석벽 아래서 피서하며’ 역시 이때 창작한 시로 사람의 세 가지 즐거움 중 세 번째 즐거움, 곧 ‘나 혼자 외롭게 찾았던 곳을 마음이 맞는 좋은 벗들과 어울려 오는 즐거움’을 읊은 것이다.

이덕무는 『선귤당농소』에서 “최상의 즐거움은 지극히 드문 일로 이런 기회는 일생 동안 다 합해도 몇 번에 불과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들은 이덕무가 평생 동안 몇 번 없는 최상의 즐거움과 마주한 순간 시흥과 시정을 도저히 참지 못해 읊은 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까닭에 시의 지극한 경지, 곧 자연스럽고 진솔한 시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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