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자가 두려워하는 약자의 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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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자가 두려워하는 약자의 힘은?
  • 한정주 고전연구가
  • 승인 2023.10.10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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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인생수업]⑯ 에우리피데스 『메데이아』…질투·분노·복수는 나의 무기Ⅳ

[한정주=고전연구가]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분노는 타인에게(혹은 자신에게) 해악을 끼친 어떤 사람에 대한 미움”(강신주 지음, 『강신주의 감정수업』, 민음사, 2013, p291)이라고 말한다.

자신에게 해악을 끼친 사람에게 분노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그 사람은 계속해서 자신에게 해악을 가할 것이다.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해악을 당할 수밖에 없다.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해야 비로소 자신에게 가하는 타인의 해악을 멈추게 할 수 있다.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하는 것, 이 경우 분노는 강자에게 맞서 싸우는 약자의 ‘삶의 무기’가 될 수 있다.

이아손이 떠난 후 메데이아는 곧바로 자신의 원수들에 대한 복수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메데이아는 독초와 약초를 능숙하게 다룰 줄 알았다.

먼저 메데이아는 자신의 두 아들을 시켜 예비 신부 글라우케에게 선물을 전달했다. 그 선물은 독이 묻은 드레스와 황금머리띠였다. 메데이아가 보낸 드레스를 입고 황금머리띠를 두른 바로 그 순간 예비 신부에게는 ‘이중의 파멸’이 찾아왔다. 머리에 두른 황금머리띠에서는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불길이 흘러내렸고 몸에 걸친 아름다운 드레스는 그녀의 하얀 살을 파먹고 들어갔다.

예비신부의 시중을 드는 하녀를 비롯한 주변의 어느 누구도 끔찍한 시신 앞에서 두려움에 떨며 만지려고 하지 않았다. 오직 크레온만이 딸의 시신 위에 쓰러져 통곡하고 포옹하며 입을 맞추었다.

시신을 부둥켜안은 채 오랜 시간 비탄과 통곡에 잠겨 있던 크레온이 마침내 자신의 늙은 몸을 일으켜 세우려는 순간 “마치 담쟁이덩굴이 월계수 가지들에 달라붙듯” 그의 몸은 딸의 하얀 살을 파먹고 들어간 드레스에 달라붙었다. 달라붙은 드레스에서 몸을 빼내려고 당기면 당길수록 크레온의 늙은 살은 뼈에서 갈기갈기 찢어졌다. 결국 잔혹한 고통 속에서 크레온은 목숨을 잃고 말았다.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복수심은 미움의 정서로 우리에게 해악을 가하는 사람에게 똑같은 미움으로 해악을 가하게끔 우리를 자극하는 욕망”(강신주 지음, 『강신주의 감정수업』, 민음사, 2013, p503)이라고 말한다. 자신에게 해악을 가하는 사람에게 똑같이 해악을 가하는 것, 그것이 복수이다.

그런 의미에서 복수는 강자에 맞서는 약자의 반격이자 강자와 약자 사이의 지배-종속 관계를 전복하고자 하는 약자의 욕망이다.

그렇다면 메데이아의 입장에서 이아손에게 가하는 가장 강력하고 잔인한 복수는 무엇이었을까. 이아손에게 가장 큰 불행과 고통을 안겨주는 것, 즉 가문의 대를 잇고 이아손이 노후를 의탁할 두 아들을 살해하는 것이었다.

‘복수의 역설’은 무엇인가. 타인에게 가장 잔인한 복수를 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닥칠 가장 큰 재앙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식 살해는 이아손에게 가장 잔인한 복수이지만 또한 메데이아에게 가장 큰 재앙이기도 하다.

“내가 얼마나 끔찍한 짓을 저지르려는지 나는 잘 알고 있어. 하지만 내 격분이 내 이성보다 더 강력하니 격분이야말로 인간들에게 가장 큰 재앙을 안겨주는 법.”(에우리피데스 지음, 천병희 옮김, 『메데이아』, 숲, 2010, p353)

메데이아의 복수에 예비 신부와 예비 장인 그리고 사랑하는 두 아들을 잃은 이아손은 그녀를 찾아와 온갖 증오와 저주의 말을 퍼부으며 죽이려고 한다. 그 순간 메데이아는 이아손의 배신이 초래한 비극을 언급하며 그를 실컷 비웃는다. 자신의 질투와 분노가 일으킨 복수극은 이아손의 배신에 대한 당연한 응보라는 것이다.

“아버지 제우스께서는 알고 계세요, 당신이 내게서 무엇을 받았고 내게 무엇을 주었는지. 당신이 나와의 결혼을 배신하고 나를 조롱거리로 삼으며 행복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안 될 일예요. 그리고 공주와의 결혼을 주선한 크레온이 이 나라에서 나를 추방하고도 벌 받지 않는다는 것도 안 될 일에요. 그것에 대해 원한다면 나를 암사자라고〔튀르레니아 땅에 사는 스퀼라라고〕 부르세요. 내가 당신의 심장을 가격한 것은 당연한 응보예요.”(에우리피데스 지음, 천병희 옮김, 『메데이아』, 숲, 2010, p365)

이 순간 메데이아는 스스로 말한 것처럼 더 이상 “무능한 자도, 나약한 자도, 온순한 자도” 아니다. 오히려 “적은 무섭게 대하되 친구는 친절하게 대하는 존재”, 즉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권리와 권한을 지키는 자기 삶의 주인이다. 강자에게 이보다 더 두려운 약자의 모습이 있을까.

메데이아의 질투, 증오, 분노, 복수는 강자 중심 사회에 맞설 때 약자가 취해야 할 삶의 태도를 깨닫게 해준다. 질투해야 할 때 질투하지 않고 증오해야 할 때 증오하지 않고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하지 않고 복수해야 할 때 복수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강자의 가치 기준과 판단에 길들여져 복종하고 굴종하는 약자와 노예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강자가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질투해야 할 때 질투할 줄 알고 증오해야 할 때 증오할 줄 알고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할 줄 알고 복수해야 할 때 복수할 줄 아는 약자의 태도와 삶이다.

아무리 약자라고 해도 이런 태도와 삶을 가지고 있다면 어떤 강자가 그 사람을 감히 함부로 대할 수 있겠는가. 그 지점에서 질투, 증오, 분노, 복수는 약자에게 삶의 힘이자 무기가 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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