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주=고전연구가]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메데이아』는 이아손과 예비 신부 글라우케의 결혼 소식을 듣고 질투, 증오, 원한, 분노의 감정에 휩싸인 메데이아의 비통한 탄식으로 시작한다.
“아아, 가련한 내가 당한 형언할 수 없는 이 고통! 어찌 통곡하지 않을 수 있을까! 소박맞은 어미의 저주받은 자식들이여, 아비와 함께 사라져버려라! 온 집이 무너져 내려라!” (에우리피데스 지음, 천병희 옮김, 『메데이아』, 숲, 2010, p312)
메데이아는 자신에게 닥친 고통스러운 상황을 되돌릴 수 있는 아무런 힘도, 자원도, 권한도 갖고 있지 않았다. 오직 질투, 증오, 원한, 저주의 말을 내뱉을 수 있을 뿐이다. 그 상황에서 만약 그녀에게 힘이 있고 자원이 있고 권한이 있다면 그것은 질투, 증오, 원한, 저주의 감정과 말들이 있을 뿐이다.
메데이아의 시대 그리스는 남자의 판단과 선택이 여자의 운명을 결정하는 남성중심의 권력 사회였다. 감당하기 힘든 불행과 고통 앞에서 메데이아가 신음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 예비 신부의 아버지 크레온이 그녀를 찾아온다. 코린토스 왕 크레온은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막강한 권력과 권한으로 메데이아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명령을 내린다. 그것은 두 아들을 데리고 코린토스를 떠나라는 추방 명령이었다. 메데이아가 자신의 딸 글라우케를 해칠 수도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메데이아가 아무리 간청해도 크레온은 추방 명령을 거두지 않았다. 결국 메데이아는 코린토스를 떠나겠다고 하면서 크레온에게 한 가지 소원만 들어달라고 간청한다. 피난처와 생계 대책을 세우기 위해 하루만 머무를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크레온은 메데이아의 간청을 들어주었다. 하루의 시간을 번 메데이아는 마침내 자기 안의 질투, 증오, 원한, 분노의 감정을 모두 폭발시켜 세 원수들, 즉 이아손, 글라우케, 크레온에게 복수할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긴다.
“그(필자 주-크레온)는 어리석게도 나를 추방함으로써 내 계획이 물거품이 되게 할 수도 있었는데 오늘 하루 동안 나를 이곳에 머물게 했고, 나는 그동안 세 원수를, 아버지와 딸과 내 남편을 시신으로 만들고 말 거예요. 그들을 죽일 방법은 너무나 많아서 먼저 어느 방법을 택해야 할지 모를 지경이에요. 친구들이여! 혼인집에 불을 질러버릴까요, 아니면 그녀의 침상이 있는 곳으로 소리 없이 들어가 날카로운 비수로 그녀의 간을 찔러버릴까요? 하지만 한 가지 곤란한 게 있어요. 내가 파멸을 꾀하며 문턱을 넘다가 잡히면 나는 죽어서 내 원수들의 웃음거리가 될 거예요.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가장 능한 지름길을 택하여 독약으로 그들을 죽일 거예요.” (에우리피데스 지음, 천병희 옮김, 『메데이아』, 숲, 2010, p323)
남편 이아손의 예비 신부 글라우케에 대한 메데이아의 감정은 ‘질투’이다.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질투란 타인의 행복을 슬퍼하고 반대로 타인의 불행을 기뻐하도록 인간을 자극하는 한에서의 미움”(강신주 지음, 『강신주의 감정수업』, 민음사, 2013, p303)이라고 말한다.
남편 이아손의 사랑을 빼앗아간 글라우케의 행복은 메데이아에게 더할 나위 없는 슬픔이다. 글라우케의 불행만큼 메데이아에게 큰 기쁨은 없다. 메데이아에게 행복의 감정에 휩싸여 있는 글라우케를 지켜보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은 없다. 글라우케의 행복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녀에 대한 메데이아의 미움은 비례하여 커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메데이아가 글라우케를 죽이기로 결심한 데는 ‘질투’의 감정이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 글라우케가 메데이아에게 직접적으로 해를 끼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만약 글라우케가 그녀에게 해를 끼쳤다면 오직 메데이아가 사랑하는 남편 이아손의 사랑을 빼앗아 간 것뿐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의문과 질문에 봉착하게 된다. 메데이아의 질투는 부끄러운 혹은 치욕스러운 감정일까. 아니면 당연한 혹은 정당한 감정일까.
이 문제는 남성 중심의 권력 사회에서 여성이 놓이게 되는 특정한 상황과 처지에서 출발해야 한다.
남성 중심의 권력 사회에서 여성의 미덕은 무엇인가. 남편이 사랑하는 여성에게 질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이 미덕은 여성들이 스스로 원해 결정한 미덕인가, 아니면 남성들이 결정해 여성들을 길들이고 강요한 미덕인가.
알다시피 조선 시대는 메데이아의 시대 못지않은 남성중심의 권력 사회였다. 이 시대 남성이 여성에게 강요한 선악의 도덕 가운데 ‘칠거지악(七去之惡)’이라는 관습이 있다. 칠거지악은 글자 뜻 그대로 ‘남편이 아내를 내쫓을 수 있는 일곱 가지 권리와 권한’이다. 이 칠거지악 중 네 번째가 ‘질투하는 경우’이다. 남편이 다른 여성을 사랑해도 아내가 질투하면 집에서 쫓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칠거지악은 남성이 세운 가치 기준과 판단일 뿐이다.
그런데 만약 여성이 이 칠거지악을 자신의 가치 기준과 가치 판단으로 내면화하면 ‘질투’는 부끄럽거나 혹은 치욕스러운 감정이 된다. 이 경우 여성은 남성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불행과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자신을 불행하게 만든 타인의 행복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행복을 위해 심지어 슬픔과 질투의 감정조차 견뎌내야 한다. 타인의 행복을 위해 스스로 불행을 감내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노예의 삶이 아니고 무엇인가.
어느 누구도 타인의 행복을 위해 자신을 불행과 고통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어서는 안 된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행복추구권은 누구에게도 양보하거나 양도해서는 안 될 천부인권 중의 하나이다. 질투를 부끄럽거나 치욕스러운 감정으로 죄악시하는 도덕 관습은 남성의 행복을 위해 여성에게 불행과 고통을 강요하는 것, 그 이상도 아니고 이하도 아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