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휴의 호는 혜환거사다. 그의 시는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품격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독특하게 한 경지를 이루어 견줄 사람이 없었다. 고서(古書)를 두루 섭렵하여 자구(字句)마다 근거가 있다. 숙은에게 보낸 시는 다음과 같다.
시골 들녘 풍경 날로 향기롭고 꽃다워져 村郊景物日芳菲
소나무 그늘에 한가로이 앉아 변화의 기미 희롱하네 閑坐松陰玩化機
금빛 잠자리와 은빛 나비가 金色蜻蜓銀色蝶
꽃 따러 정원 속에서 마음대로 날아다니네 菜花園裏盡心飛
그의 ‘산골 집을 방문해서(訪山家)’라는 제목의 시는 다음과 같다.
소나무 숲 다 지나자 길이 세 갈래 松林穿盡路三丫
언덕 가에 말 세워두고 이씨 집을 찾네 立馬坡邊訪李家
농부가 호미 들어 동북쪽을 가리키니 田父擧鋤東北指
작소촌(鵲巢村) 안 석류꽃 나타나네 鵲巢村裏露榴花
‘유감(有感)’이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산골 백성은 바다 어보(魚譜) 만들고 峽民譜海魚
한(漢) 지방 사람은 오(吳) 지방 죽순 그리네 漢客畫吳笋
그것을 본토 사람에게 보여주면 持示本土人
허리 잡고 웃지 않을 사람 별로 없겠지 鮮不捧腹哂
‘역사를 읊다’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자못 예의와 법도를 닦을 줄 알고 頗知修儀度
또한 고금에도 통달했네. 亦能通古今
허나 오직 바로 득실을 근심한 까닭에 惟是患得失
성명만 전할 뿐 마음은 전하지 못했네 傳姓不傳心
공광(孔光)을 가리키는 뜻이다.
글만 강의하는 것 참된 학문 아니고 徒講非眞學
군자는 수신(修身)을 귀하게 여기네 君子貴修身
신(新)나라 세운 왕망 찬양하기보다는 如其贊新莽
차라리 장사꾼 짐 싣는 것이 낫지 않으랴 曷若載賈人
양웅(楊雄)을 가리키는 뜻이다.
연강(淵康: 황해도 장연)의 부임지로 떠나는 정사군을 전송하면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피와 살이 사람의 몸 이루니 血肉所成軀
누구인들 고통 두렵지 않겠는가 誰不畏痛苦
나는 병들면 침(鍼)조차 꺼리면서 我則病忌鍼
남을 때릴 때는 쉽게 그 숫자 더하는구나 杖人輒增數
이러한 시들을 읽어보면, 그가 단지 달과 이슬과 꽃과 새 등의 쓸모없는 글만 짓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청비록 4』 (재번역)
[한정주=고전연구가] 18세기 조선를 대표하는 문학사의 라이벌을 꼽으라고 하면 십중팔구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을 언급한다.
박지원과 정약용을 같은 시대의 인물로 보거나 심지어 두 사람을 18세기 조선의 문학사를 대표하는 ‘위대한 거장’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반은 맞고 반을 틀렸다고 할 수 있다. 거시적인 방법이 아닌 미시적인 방법으로 조선의 문학사를 들여다보면 18세기 중후반이 박지원의 전성시대였다면 정약용의 전성시대는 18세기라기보다는 오히려 19세기 초반이라고 해야 한다.
더욱이 1737년생인 박지원보다는 한 세대, 또 1762년생인 정약용보다는 무려 두 세대나 앞선 1708년 태어나 18세기 문단을 주름잡은 이용휴의 존재를 알게 되는 순간 누구라도 박지원과 정약용을 18세기 문학사의 양대 라이벌로 보는 시각이 크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오히려 18세기 새로운 문예사조를 추구했던 수많은 문사와 지식인들은 박지원과 정약용보다는 이용휴의 문학적 영향력 하에 있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말이다.
이덕무 역시 예외가 아니다. 비록 혹평이지만 이용휴와 이덕무의 관계를 입증해주는 심노숭의 기록을 읽어보자.
“서류(庶類) 출신인 이덕무와 박제가는 당대에 명성이 높았다. 아버지께서는 이덕무와 박제가가 지은 시문을 보고 나서 탄식하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영조 말년에 이와 같이 일종의 사악하고 음란한 이용휴, 이봉환과 같은 패거리가 있었다. 이덕무나 박제가 등의 무리는 이들 패거리를 본받아 마침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그들의 작품에 담긴 작풍과 기질을 엿볼 수 있다. 이덕무와 박제가 등의 무리는 말할 것도 없고 사대부의 자제들까지 이용휴, 이봉환 패거리를 본보기로 삼고 있으니 세상을 다스리는 올바른 도리에 작은 근심거리가 아니다.”
이덕무의 시풍을 가리켜 ‘기궤첨신하다’고 비평한 김택영 역시 18세기에 와서 시풍 혁신을 개척한 선구자로 이용휴를 꼽으면서 이덕무 시의 기궤첨신함이 이용휴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이덕무가 볼 때 이용휴는 이미 ‘독특하게 한 경지를 이루어 견줄 사람이 없을 정도로 독보적인 수준’에 도달한 시를 쓴 사람이었다. 어느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독특함과 기이함과 참신함이야말로 이덕무가 추구한 ‘새로운 시의 세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