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시…이덕무와 신동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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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시…이덕무와 신동엽
  • 한정주 고전연구가
  • 승인 2021.02.22 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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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무 詩의 온도](62) 천안 농가에서 쓰다

묵은 찹쌀로 담근 술 맛있게 김 오르니          紅米爲醪暖欲霞
털모자 쓴 글방 선생 날마다 찾아오네           氈冠學究日相過
낫을 찬 꼴머슴은 갈대 베다 쉬고 있고          園丁斫荻腰鎌憩
냇가의 수건 두른 여인 빨래하며 노래하네      溪女挑綿首帕歌
서리 내린 들녘에는 벼 쪼아 먹는 기러기 쫓고  唼稻霜陂驅白鴈
볕 쬐는 언덕에는 고양이 숨겨 국화를 지키네   蔭猫陽塢護黃花
타향의 사투리는 객지의 시름을 잊게 하니      旅愁消遣它鄕話
깊고 깊은 흙담집에 누워서 듣네                 臥聽深深土築窩
『아정유고 1』 (재번역)

[한정주=고전연구가] 충청도 천안에 있는 농가를 찾아 묵으면서 직접 경험한 농촌 풍경을 묘사한 시로 향토색이 짙게 배어 있다.

필자는 20대 대학 시절부터 김수영과 신동엽의 시를 좋아했다. 40대 이후 이덕무의 시를 좋아하게 되면서 ‘왜 그들의 시를 좋아하게 되었을까’ 자문해 봤다. 그것은 세 사람 사이에 연관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덕무와 김수영의 연관성을 ‘아방가르드 정신’에서 찾는다면 이덕무와 신동엽의 연관성은 ‘향토성’에서 찾을 수 있다. 의식했든 의식하지 못했든 그들 시의 바탕에 흐르고 있는 ‘아방가르드 정신’과 ‘향토성’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 세 사람을 함께 좋아하게 된 것이다.

향토성은 특정한 나라 혹은 지방이 지니고 있는 고유한 특징 혹은 특유의 색깔을 말한다. 시에서 향토성은 특정한 나라 혹은 지방 사람이 느끼는 서정 혹은 정서의 묘사를 뜻한다.

이덕무는 자신은 조선 사람이기 때문에 ‘조선의 시’를 쓴다고 말했다. 신동엽은 자신은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한국의 시’를 쓴다고 말했다. 이러한 까닭에 이덕무의 시에는 조선 사람의 서정 혹은 정서가 짙게 배어 있고, 신동엽의 시에는 한국 사람의 서정 혹은 정서가 짙게 배어 있다.

조선 사람은 조선 사람이기 때문에 중국이나 일본 사람과는 다른 특유의 정서를 가지고 있다. 한국 사람은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미국이나 독일 사람과는 다른 독특한 정서를 가지고 있다.

조선 사람보다 더 조선 사람의 정서를 잘 표현하고 묘사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또한 조선 사람이 제 아무리 해도 중국과 일본 사람의 정서를 그들보다 더 잘 표현하고 묘사할 수는 없다.

그런 까닭에 조선 사람은 중국과 일본의 시를 쓰지 않고 조선의 시를 써야 한다. 조선 사람이 조선의 시를 쓰지 않는다면 누가 조선 사람의 서정 혹은 정서를 제대로 드러내 묘사하고 표현한 시를 쓰겠는가.

마찬가지 이치로 한국 사람보다 더 한국 사람의 정서를 잘 표현하고 묘사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또한 한국 사람이 제아무리 해도 중국과 일본 사람의 정서를 그들보다 더 잘 표현하고 묘사할 수는 없다.

그런 까닭에 한국 사람은 미국과 일본의 시를 쓰지 않고 한국의 시를 써야 한다. 한국 사람이 한국의 시를 쓰지 않는다면 누가 한국 사람의 서정 혹은 정서를 제대로 드러내어 묘사하고 표현한 시를 쓰겠는가. 그렇게 해야 비로소 중국과 일본의 시와는 다른 조선의 시가 존재할 수 있고, 미국과 독일의 시와는 다른 한국의 시가 존재할 수 있다. ‘향토시’의 존재가치와 존재의미가 바로 그곳에 있다.

정약용 또한 말년의 한 가지 즐거움을 ‘조선 시’에서 찾았다. ‘늙은이의 한 가지 통쾌한 일’이라는 제목의 시에서 정약용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늙은이의 한 가지 즐거움 / 붓 가는 대로 멋대로 쓰네 / 경병(競病)에 구속받을 필요 없고 / 퇴고(推敲) 또한 오래 할 필요 없네 / 흥이 오르면 곧 이리저리 생각하고 / 생각이 이르면 곧 써 내려가네 / 나는 바로 조선 사람이라 / 조선 시 짓기를 좋아하네 / 누구나 자신의 작법(作法)을 쓰는데 / 오활(迂闊)하다 비난할 사람 누구인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정약용은 마음 가는 대로 붓을 놀려도 시가 되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시를 짓는 데 어려운 운(韻)자를 사용하는 ‘경병(競病)’에 구속받지 않고 시의 자구(字句)를 여러 번 고치는 퇴고(推敲) 역시 오래 고민하지 않는다. 그저 흥이 오르면 생각하고 생각이 이르면 써 내려가는데 자신은 조선 사람이라 ‘조선 시’를 쓸 뿐이다.

자신만의 작법, 즉 ‘조선 시’를 쓰는데 누군가 사리에 어둡고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정약용은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조선 시’는 정약용이 늙어서 누리는 한 가지 통쾌한 즐거움이다. 현달한 사람들은 구태여 말을 섞지 않아도 일맥상통하는 게 있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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