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에서 공직생활을 하는 고향친구가 나에게 계족산(423.6m)을 보여주고 싶다며 전화를 했다. 꼬맹이 중학교 시절 고샅길을 함께 거닐던 지중한 인연이다.
등산복을 주섬주섬 챙겨입고 대전으로 발길을 옮긴다. 고속버스 좌석에 앉아 어린 시절의 사념에 잠겨 드니 그 시절 정경이 선연하게 떠오른다. 이맘 때쯤 갈탄 난로 위에 양은도시락을 층층이 포개고 점심시간을 기다리던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차창 밖으로 서서히 퍼지는 아침햇살에 텅빈 들판이 따뜻하게 비쳐난다. 고속도로에 진입한 버스는 막힘없이 달려 대전터미널에 도착해 분주하게 이동하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택시로 계족산 트레킹 들머리인 장동산림욕장에 도착했다.
계족산은 대전의 동쪽 외곽에 높지 않은 산이다. 유순하며 숲이 좋아 서쪽의 계룡산(845m)과 함께 대전 명산으로 꼽힌다.
산자락엔 백제의 역사를 품은 계족산성과 장동산림욕장이 있고 숲속 황톳길 맨발 걷기로 자연의 질감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휴식처이며 언제나 대전 시민을 반겨주는 산이다.
산 이름은 주능선에서 지능선들이 닭발처럼 뻗어나간 산세에서 비롯됐다고 해 닭다리산 혹은 계족산(鷄足山)이다.
문화유산과 함께하는 걷기는 건강과 옛 터전과의 교감이 생겨 더욱 만족스럽다.
장동산림욕장 주차장에서 출발해 계족산성~성재산~남동릉~봉황정(계족산 정상)~숲길 삼거리 진행한다. 주차장에서 임도를 따라 조금 걸어 들어가면 공원관리사무소 앞에서부터 붉은 황토를 약 2m 넓이로 깔아 구불구불한 정상까지 황톳길이 이어져 보기만 해도 심신이 맑아지는 기분이 든다. 총 14.5km를 맨발로 흙을 체험할 수 있게 했다.
임도에는 좋은 황톳길을 조성해 놓았지만 겨울인지라 등산화를 벗지 못해 아쉽다. 봄부터 가을까지 맨발로 트레킹하는 사람들이 넘쳐 연 100만명이 찾는 명소다.
길 따라 오르면서 세족장과 정자와 쉼터가 마련돼 있고 숲속에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약 20분쯤 오르니 숲속 공연장에 도착한다. 이곳에도 세족장, 정자쉼터, 화장실이 잘 갖춰져 있다.
공연장 삼거리에서 오른편 데크길로 접어 오르면 임도와 만나는 삼거리에서 산성까지는 700m. 다시 가파른 데크계단길을 15분 정도 오르면 돌들이 쌓여 거대한 규모를 완성한 계족산성이 나타난다.
약 1시간10분 만에 계족산성 서문을 통과한다. 계족산성 위 넓은 평지에 키 큰 소나무 세 그루가 겨울 산성의 풍경을 거들고 있다.
산 정상부에 축조된 산성은 생각보다 높이와 길이의 규모가 크고 관리가 잘 되어 있다. 천년세월 지상에서 의연하게 버팀하고 있는 이 고장 최고의 산성이다.
사방으론 막힘없는 조망이 펼쳐지고 푸른 대청호 뒤로 크고 작은 산봉우리가 끝없이 이어진다. 산 서쪽으론 대전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는 가슴이 후련해지는 조망처다.
찬바람이 좀 덜한 곳을 찾아 잠시 휴식을 취하며 마른 목을 축이고 가벼운 간식을 먹은 후 산길을 이어간다. 등산로 갈림길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어 길을 잘못 잡을 수 있어 이정표를 주의 깊게 살필 필요가 있다.
성재산을 거쳐 편안한 숲길 따라 절고개 갈림길을 지나 봉황정에 도착 후 하산했다.
산은 봄 여름 가을 겨울 각각 다른 얼굴과 표정으로 우리를 말없이 지켜본다. 높든 낮든 만만한 산이란 결코 없다.
‘산경표’라는 책을 쓴 신경준(申景濬)은 “길에는 주인이 없어 그 길을 가는 자가 주인이다”고 했다.
겨울 칼바람과 하얀 설산(雪山)에서 심장이 뛰고 허파가 한껏 부풀려 팽팽한 생기를 찾고 싶은 생각에 기대가 커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