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창자를 맑게 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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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창자를 맑게 씻고 싶다”
  • 한정주 역사평론가
  • 승인 2020.05.15 0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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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무 詩의 온도]⑰ 시화(詩話), 시품(詩品), 시평(詩評)

하늘과 땅에 서린 맑은 기운    乾坤有淸氣
시인의 창자 속에 스며드네     算入詩人脾
천 명과 만 명의 사람 중에서   千人萬人中
한 사람 혹은 두 사람만 아네   一人兩人知

이는 당나라 스님 관휴의 시다. 생각해보면 나는 본래 시를 잘 짓지 못하면서도 시를 논하는 것은 좋아하였다. 이에 한가롭게 지내는 동안 눈과 귀가 미치는 대로 고금의 시구(詩句)를 손수 기록한 다음 거기에 변증(辨證)·소해(疎解)·품평(品評)·기사(記事)를 붙였다. 일정한 순서나 차례 없이 기록해 비록 어지럽지만 항상 머리맡에 간직해두고 보았다.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고 오직 혼자 마음속으로 즐거워하며 ‘나의 창자를 맑게 씻고 싶다’는 뜻을 담아 그 이름을 『청비록(淸脾錄)』이라고 하였다.『청비록 1』(재번역)

[한정주=역사평론가] 이덕무는 마음에 드는 고금의 시구를 모은 다음 논하는 것을 매우 즐거워했다. 수십 년 동안 그렇게 하다 보니까 한 권의 책을 엮을 만큼 많아졌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책이『청비록』이다. 좋은 시구를 얻어서 나의 창자를 맑게 씻고 싶다고 해서 붙여진 제목이라고 한다.

이덕무는 왜 이토록 좋은 시구를 모아 논하는 것에 집착했던 것일까? 시를 볼 줄 아는 안목과 식견을 키우기 위해서였다.

한시에 대해 논할 때는 크게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첫 번째 방법은 시화(詩話)다. 시화는 시에 얽힌 이야기를 말한다. 누가, 언제, 어디서, 왜, 어떻게 이 시를 지었는가를 스토리텔링하는 것이다.

시화는 시를 더 깊게 알고 더 풍부하게 이해하는데 유용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시를 지을 때 작자의 마음과 감정, 뜻과 기운 그리고 생각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방법은 시품(詩品)이다. 시품은 시의 풍격과 품격을 뜻하는데, 쉽게 말하자면 시가 풍기는 아우라라고 이해하면 된다.

예를 들어 맑고 새롭다는 뜻의 ‘청신(淸新)’, 기이하고 오묘하다는 뜻의 ‘기묘(奇妙)’, 정밀하고 우아하다는 뜻의 ‘정아(精雅)’, 웅장하고 탁 트여 막힘이 없다는 뜻의 ‘웅혼(雄渾)’, 담백하고 담담하다는 뜻의 ‘충담(沖淡)’, 높고 예스럽다는 뜻의 ‘고고(高古)’ 등이 그것이다.

세 번째 방법은 시평(詩評)이다. 시평은 시에 대한 비평이다. 비평은 잘 지은 시인가 아니면 잘못 지은 시인가 혹은 좋은 시인가 아니면 나쁜 시인가를 따져보면서 그 시의 가치와 의미를 분석하고 판단하는 것이다.

시를 지으려면 무엇보다 시에 대한 안목과 식견을 갖춰야 한다. 좋은 시와 나쁜 시를 볼 줄 아는 안목과 식견이 있어야 좋은 시를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시를 짓지 않는다고 해도 시를 감상하는 방법을 안다면 시 읽는 재미와 묘미를 만끽할 수 있다. 하지만 시는 시적 언어를 통한 압축과 생략의 문학이기 때문에 산문에 비해 읽기가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만약 시화, 시품, 시평을 결합하는 방법으로 읽으면 한시뿐만 아니라 현대시도 훨씬 더 쉽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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