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들녘 바라보니 시의 정취 쓸쓸하고 望野吟情正悵然
굽이치는 가을 물결 긴 하늘 맞닿았네 縈回秋水際長天
제비는 새끼 끼고 발 밖에 훨훨 날고 玄禽挾子飛簾外
기러기는 무리지어 울며 집 앞을 지나가네 白雁叫群過閣前
아득아득 먼 산 해마저 지는데 渺渺遠山將落日
가물가물 외딴 섬 물안개 비껴섰네 茫茫孤嶼已橫煙
높고 낮은 배 돛대 강 어구에 어지럽고 參差舟楫迷江口
두둥둥 북소리에 장사꾼 떠나려 하네 打鼓商人欲發船
『영처시고 1』(재번역)
[한정주=역사평론가] 가을 풍경의 묘사일 뿐인데 작자의 쓸쓸함과 외로움을 느낄 수 있다.
시에는 감정이 있는가. 당연히 있다. 글을 읽는 순간 마음속에 어떤 감정이 일어난다. 글에 감정이 있기 때문이다.
감정은 생물만이 지니고 있는 고유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글은 사물(死物)이 아닌 생물(生物)이다. 글에 감정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덕무는 이렇게 말한다.
“글에는 감정이 있는가? 당나라 현종이 사랑하는 양귀비와 사별한 후 지은 ‘새가 울고 꽃이 피고 물이 푸르고 산이 푸르다’가 바로 그것이다.”
만약 현종이 아닌 다른 사람이 이 시를 지었다면 독자는 단지 새가 울고 꽃이 피고 물이 푸르고 산이 푸른 자연의 풍경을 묘사한 시구로 읽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하는 양귀비와 사별한 후 현종이 지었다는 사실을 알고 읽으면 전혀 다르게 읽힌다.
새는 변함없이 울고 꽃은 변함없이 피고 물과 산은 변함없이 푸른데 사랑하는 양귀비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슬픔과 절망의 감정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작법(作法)과 시법(詩法)에 맞춘 시는 인공지능을 갖춘 로봇도 지을 수 있다. 하지만 감정을 담은 시는 사람만이 지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작법과 시법에 잘 맞춰 지은 시가 죽은 시라면 비록 작법과 시법에 맞지 않더라도 자신의 감정을 담아 지은 시는 살아있는 시라고 할 수 있다.
전자의 시가 좋은 시인가 아니면 후자의 시가 좋은 시인가.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