披拂龍旗柳影斜 용 깃발 나부끼고 버들가지 하늘하늘
滿城春氣鬱葱佳 성안 가득 봄기운 완연하여 아름답고
君王正己亭前立 군왕께서 정자 앞 곧추서서 활을 쏘니
箭底紅心望若花 화살 꽂힌 붉은 과녁 꽃송이 다름없네. (『번암집』 제1권)
화성 방화수류정에서 정조의 활쏘기를 보고 쓴 번암 채제공의 시다. 제목은 <방화수류정에서 친히 활을 쏘아 과녁에 세 발을 맞히고 내려 보여준 어제시에 삼가 차운하다. 정사년>(敬次御製訪花隨柳亭親射的 獲中三矢 俯示韻 丁巳)이다.
방화수류정은 화성 화홍문 위쪽의 성곽에 붙어 있는 각루(角樓)로 1794년(정조 18년) 건립됐다.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 노닌다(訪花隨柳)’는 뜻의 방화수류정은 독특한 평면과 지붕형태로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경관도 달리 보인다. 주변을 감시하고 군사를 지휘하는 지휘소와 주변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정자의 기능을 함께 지니고 있다. 북문인 장안문과 동문인 창룡문 사이에 있어 동북각루(東北角樓)로도 불린다.
방화수류정에 군왕을 상징하는 용 깃발이 나부끼고 3월 초순의 버들가지 하늘거리는 완연한 봄기운이 성안에 가득한 주변 경치의 아름다움을 읊었다. 여기에 정자 앞에서 활을 쏘는 정조의 모습이 더해지면 한 폭의 그림이 따로 없다.
특히 붉은 과녁에 촘촘히 꽂혀 있는 화살의 모습이 마치 활짝 핀 붉은 꽃처럼 보인다는 표현은 백미다. 붉은 과녁은 꽃잎이고 촘촘히 꽂힌 화살을 꽃 중앙에 모여 있는 꽃술로 묘사한 것이다.
정조는 1797년 음력 1월29일 화성의 서장대·화양루·화서루를 둘러보고 방화수류정에서 유엽전 3순을 쏘아 3발을 맞힌 뒤 칠언절구를 지어 신하들에게 보여주었다.
『정조실록』은 이날 정조의 행차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 가운데 방화수류정에서의 활쏘기와 관련된 부분은 다음과 같다.
“상이 성을 순행했다. 화양루(華陽樓) 북쪽에서 시작해 화서루(華西樓)를 지나 공심돈(空心墩)에 이르러 각신(閣臣)과 승지에게 이르기를 ”공심돈은 우리 동국(東國)의 성제(城制)에서는 처음 있는 것이다. 여러 신하들은 마음껏 구경하라“ 했다.
장안문(長安門)을 지나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에 이르러 조그만 과녁을 설치하고 임금이 화살 삼순(三巡)을 쏘아 삼시(三矢)를 맞힌 뒤 각신(閣臣)과 장신(將臣)에게 짝지어 활을 쏘라고 명했다.
상이 정자 아래에서 백성들이 꽉 둘러서서 구경하는 것을 보고 수원부 유수 조심태(趙心泰)에게 명해 그중에 활을 잘 쏘는 자를 뽑아서 활쏘기를 시험하게 한 다음 1등을 한 1인에게 바로 전시(殿試)를 볼 수 있는 자격을 주고 풍악을 내려서 보내었다. 여러 신하들에게 술을 내리고 임금이 칠언소시(七言小詩)를 지은 뒤 여러 신하들에게 화답해 올리라고 명했다.”
정조가 방화수류정에 행차했던 당시 채제공의 나이는 78세였다. 당시 채제공은 좌의정으로 정조를 수행했다. 체제공은 정조가 칠언소시를 지은 뒤 여러 신하들에게 화답해 올리라고 명한 데 따라 이를 차운해 이 시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