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신년(庚申年·1440년 세종 22년)
確强固不弛 굳고 강한 활시위 늦추지 않으니
神功在力難 신묘한 공적 힘으로는 어렵다
不違帶斜陽 어김없는 화살에 석양빛 띠니
英雄意自閑 영웅의 뜻은 절로 한가하구나
또
신유년(辛酉年·1441년·세종 23년)
穿葉非神力 나뭇잎 뚫는 것 신통력 아니니
牛毛亦可拂 쇠털이라도 맞힐 수 있다네
盖言經史暇 경서와 사기를 논하던 여가에
彈丸帶斜日 쏜 탄환이 석양빛 띠는구나. (『열성어제』 제3권)
<화살갑에 대해 쓴 시 2수(題箭匣二首)>라는 제목으로 세조가 쓴 시다. 세조는 1455년 즉위해 1468년까지 14년 동안 조선을 통치했다. 이 시는 즉위 14~15년 이전인 수양대군 시절 썼다.
세조는 어렸을 때는 민가에서 자랐는데 도량이 넓고 활과 말을 좋아했던 호방한 무인의 기질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 시에서도 이 같은 무인의 기질과 호방한 성격이 그대로 드러난다. 자신을 영웅으로 표현하고 100보 거리에서 버들잎을 쏘면 백발백중이었다는 중국 전국시대 초(楚)나라 양유기의 활솜씨가 신통력이 아니라며 자신은 소의 털이라도 맞힐 수 있다고 호기롭게 말한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세조는 연평균 22차례 사냥을 나가 역대 조선 국왕 중 세종(24차례)에 이어 두 번째로 사냥을 즐겼다. 그는 언제든 사냥을 나갈 수 있도록 항상 활과 화살을 몸에 지니고 다닐 정도였다. 특히 호랑이 사냥을 광적으로 좋아했던 세조는 직접 잡은 호랑이만 13마리에 이르며 호랑이 사냥으로 이름을 떨친 한 사냥꾼을 신분제마저 무시하며 겸사복(국왕의 호위병)으로 특채한 사례도 있었다.
세조는 사냥과 함께 술자리도 즐겼는데 계유정난과 피의 숙청을 통해 조카 단종과 정적들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른 후 신하들과 결속을 다지고 한편으로는 그들의 충성을 시험해 보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성종의 명으로 간행한 신숙주의 시문집 『보한재집』에는 “정축년(1457년 세조 3년) 겨울 주상이 종친과 입직한 여러 장수에게 명해 활쏘기 시합을 해서 술내기를 하게 하고 술을 마시며 즐겼다. 주상도 때때로 활을 잡고 쏘았는데 맞히지 못하는 적이 없어 여러 신하들이 칭송하며 축하했다. 주상이 화살갑을 가져다 이극감(李克堪)에게 주며 말하기를 ‘내가 젊었을 때 시 짓는 것을 즐겨 화살갑에 대해 쓴 것이 있으니 경이 화답해 지어보라’고 하고 또 자리에 있는 자들에게 명해 이어서 화답하게 했다. 그리고 신 신숙주에게 그 전말을 쓰도록 명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내가 젊었을 때 시 짓는 것을 즐겨 화살갑에 대해 쓴 것이 있“다는 시가 바로 <화살갑에 대해 쓴 시 2수(題箭匣二首)>다.
그런데 조선 초기의 학자 서거정의 시문을 모아 엮은 책 『사가집(四佳集)』에는 “초8일에 사정전(思政殿)에서 강(講)이 끝나자 주상이 신과 이조참의 신 임원준(任元濬)에게 어제의 <과녁을 쏘는 시(射帿詩))에 주(註)를 달도록 명해 곧바로 올렸다”고 적고 있다.
서거정이 주를 달아 올린 어제(御製) <과녁을 쏘는 시>는 곧 <화살갑에 대해 쓴 시 2수(題箭匣二首)>를 말한다.
실제 『조선왕조실록』 「태백산사고본」 1책 1권에는 서거정이 기록한 <과녁을 쏘는 시(射帿詩)>로 되어 있다.
『세조실록』 1권 총서 4번째 기사 ’세조가 여러 종친들과 함께 활쏘기를 하다‘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임자년(1432년·세종 14년) 6월 세조가 금성대군 이유(李瑜) 등 여러 종친과 더불어 회사(會射)를 했는데 백발백중하니 무인 양춘무(楊春武)가 곁에 있다가 감탄해 말하기를 “국내 제일가는 명수입니다”고 했다. 세조가 또 일찍이 경회루 못 남쪽에 조그마한 과녁을 설치했는데 물을 사이에 두고 있어 그 거리를 잴 수 없었지만 종일 쏘아도 한 개의 화살도 물에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면서 세조가 일찍이 지었다는 <과녁을 쏘는 시(射侯詩)>를 소개하는데 바로 <화살갑에 대해 쓴 시 2수(題箭匣二首)>와 동일하다.
<화살갑에 대해 쓴 시 2수(題箭匣二首)>란 제목으로 시를 수록한 『열성어제』는 1631년(인조 9년) 의창군 이광(李珖)에 의해 처음 간행됐다. 그는 단종과 연산군을 제외한 태조부터 선조까지 12대 임금들의 글을 편집해 1책의 목판본으로 간행했다. 따라서 세조의 <사후시(射侯詩)>를 편집해 제목을 다시 붙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