風靜天開矢道明 바람 자고 맑은 날 활쏘기 하네
傳觴破的善哉爭 술잔 돌리며 과녁 맞히니 좋은 경쟁이로다
罰籌已覺蝟毛積 벌주가 한도 없이 쌓였으니
定是寒儒浪自驚 빈한한 선비가 부질없이 놀라는구나. (『고봉집』 제1권)
조선 선조 때의 성리학자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1527~1572년)이 쓴 <從牧伯飮(종목백음): 목백과 함께 술을 마시다>라는 제목의 시다. 한가하고 여유가 있는 유유자적한 선비의 풍류가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다.
牧伯(목백)은 지방 행정 단위의 하나인 목을 맡아 다스리던 정삼품의 외직 문관으로 고을수령을 일컫는다. 矢道(시도)는 화살을 통과시키는 가느다란 대롱[筒]으로 통아(桶兒)를 말한다. 편전(片箭), 즉 애기살을 쏜 것으로 추정된다.
善爭(선쟁)은 『논어(論語)』 「팔일(八佾)」에서 “군자는 다투는 것이 없지만 반드시 활쏘기에서는 경쟁을 한다. 상대에게 읍하고 사양하며 올라갔다가 내려와서는 술을 마시니 그 다툼이 군자다운 다툼이다(君子無所爭 必也射乎 揖讓而升 下而飮 其爭也君子)”를 인용했다.
罰籌(벌주)는 벌로 마시는 술잔의 숫자를 말한 것으로 罰酒(벌주)의 의미이며 蝟毛(위모)는 고슴도치의 털로 많은 수량, 즉 수가 많음을 비유적으로 이른다. 寒儒(한유)는 가난한 선비라는 뜻이다.
바람도 없이 청명하게 맑은 날 고을수령인 목사(牧使)와 자리를 함께 했지만 한양 조정의 정쟁 등 현실정치와 세상사 돌아가는 복잡한 일 따위, 즉 세속적 제반가치는 모두 제쳐두고 활쏘기를 겨루며 술잔을 돌리는 탈세속적인 풍류정신이 읽혀진다.
또한 활쏘기에서 연달아 져 벌주가 고슴도치 털처럼 많이 쌓인 가난한 선비일지언정 놀랄 일이 무엇이겠느냐면서 시비와 욕망마저도 벗어버렸다.
자칫 현실도피나 염세적인 시로 읽힐 수 있지만 오히려 세속적 명리(名利)와의 타협을 거부하고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굴레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기상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