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사의 그림 〈황학정도〉가 바꾼 황학정 사두 계보…1925년 성문영 사두 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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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사의 그림 〈황학정도〉가 바꾼 황학정 사두 계보…1925년 성문영 사두 명기
  • 한정곤 기자
  • 승인 2023.02.23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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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학정사계규정」에는 초대사두 김세욱…사계장·사두 뒤섞여 현재 계보 뒤죽박죽

근대 활쏘기의 종가로 불리는 황학정의 사두(射頭) 계보에 중대한 오류가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초대사두는 흔적도 없이 지워졌고 근대 활쏘기의 아버지라 일컫는 성문영 사두의 취임 연도에는 엉뚱한 사계장(射契長) 이름이 끼워 넣어져 사두 계보 자체가 뒤죽박죽이다.

이 같은 오류는 위사 강필주(渭士 姜弼周)의 그림 <황학정도(黃鶴亭圖)>에서 일부 해석하지 못한 화제(畫題)의 의미를 재해석함으로써 밝혀졌다.

위사 강필주의 황학정도(黃鶴亭圖). 왼쪽 상단 화제에 ‘靑牛榴花節 爲 射頭雲老大人 法餐(청우유화절 위 사두운로대인 법찬)’, 즉 1925년 음력 5월 사두 성문영을 위해 활쏘기 잔치를 벌였다는 글이 쓰여있다.
위사 강필주의 <황학정도(黃鶴亭圖)>. 왼쪽 상단 화제에 ‘靑牛榴花節 爲 射頭雲老大人 法餐(청우유화절 위 사두운로대인 법찬)’, 즉 1925년 음력 5월 사두 성문영을 위해 활쏘기 잔치를 벌였다는 글이 쓰여있다.

<황학정도>는 온깍지궁사회가 발간한 『국궁논문집』(2013년)에서 처음 소개됐다. 경희궁에서 현재의 등과정 터로 옮긴 황학정을 그린 진경산수화로 대여섯 명은 정자 안에서 잔치를 벌이고 있으며 서너 명은 사대에서 활을 쏘고 있다. 그림의 왼쪽 상단에는 다음과 같은 화제가 쓰여있다.

白岳山下 黃鶴亭 武夫濟唱 貫中聲
靑牛榴花節 爲 射頭雲老大人 法餐
渭士 七十三歲 眞畵
鶴雲散人 題
石泉居士
於奎居士 贊

백악산 아래 황학정엔 무부(한량)들이 관중소리 외친다.
청우유화절(음력 5월)에 황학정 사두 운로(성문영의 호) 대인을 위해 위사(강필주)가 73세에 그렸다.
학운산인 김중환이 화제를 짓고 석천거사 유해종과 어규거사가 도움을 주었다.

『국궁논문집』은 위사의 생몰연대를 확인하지 못하고 ‘청우유화절(靑牛榴花節)’의 의미를 해석하지 못한 채 그림을 그린 연대를 1928년 이후로 추정했다. 경희궁의 황학정이 그림의 배경이 되는 등과정 터로 이전한 시기가 1922년이고 『황학정 백년사』에 1928년 취임했다고 기록한 성문영 사두를 위해 그린 그림이라는 점이 근거로 제시됐다.

그러나 구한말을 거쳐 일제강점기까지 활동했던 화가 위사 강필주는 1852년 태어나 1932년 별세했다. 그림을 그렸다고 화제에 적은 그의 나이 73세는 1925년이다.

특히 화제에는 ‘靑牛榴花節(청우유화절)’이라고 그림을 그린 시기를 한 번 더 명확하게 표기했다.

청우(靑牛)는 ‘푸른 소’라는 뜻으로 60갑자 중 두 번째 해인 을축년(乙丑年)을 말한다. 오행 중 을목(乙木)의 푸른(靑) 기운과 12간지 중 소(丑)가 합쳐져 ‘푸른 소(靑牛)의 해’로 불린다. 청우가 1925년의 다른 표현이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유화절(榴花節)은 석류꽃이 피는 음력 5월을 가리킨다. 또한 법찬(法餐)은 잘 쓰이는 용어가 아니지만 그림과 화제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잔치라는 의미로 풀이된다. 즉 활쏘기 잔치로 해석이 된다. 운로(雲老)는 성문영의 호다.

다시 해석하면 ‘靑牛榴花節 爲 射頭雲老大人 法餐(청우유화절 위 사두운로대인 법찬)’은 “1925년 음력 5월 사두 성문영을 위해 활쏘기 잔치를 벌였다”는 뜻이 된다.

문제는 성문영 사두를 위한 활쏘기 잔치가 1925년 행해졌다는 점이다. 『황학정 백년사』와 황학정 사우회관에 걸려있는 역대 사두 초상화를 통해 지금까지 알려진 황학정 사두 계보에서 성문영 사두의 취임 연도는 1928년이다. 1925년부터 1927년까지의 사두는 김영배(金寧培)다.

성문영 사두가 취임 3년 전에 사두를 사칭하며 지인들과 잔치를 벌인 것이 아니라면 <황학정도>의 화제는 기존 황학정 사두 계보를 전면 부정하고 있다.

역대 사두를 소개하고 있는 『황학정 백년사』.
역대 사두를 소개하고 있는 『황학정 백년사』.

현재 황학정의 사두 계보는 ‘초대 나세환, 2대 엄주익, 3대 정행렬, 4대 김영배, 5대 성문영’ 순이다.

그러나 초대사두로 내세운 나세환의 취임 연도가 1907년이다. 황학정이 창건된 1899년부터 이때까지 사두가 없었다는 것인지 의문시된다.

『황학정 백년사』는 그 자리에 대한제국 황태자였던 이척(李坧)을 올려놓았다. 황학정 창건 당시부터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純宗)으로 즉위한 1907년까지 총재로 재임해 황학정에는 사두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온깍지궁사회가 2013년 <황학정도>와 함께 처음 공개한 「황학정사계규정(黃鶴亭射契規程)」에는 사두의 이름이 또렷하게 기재돼 있다. 「황학정사계규정」은 황학정 창건 당시인 1899년 8월10일 사원들이 채택한 규정집으로 가장 오래된 황학정 기록물이다.

‘사계서문’과 ‘사계규정’에 이어 임원명단을 수록하고 있는 8쪽짜리 인쇄본에는 계장 민영환, 부계장 민경식과 함께 ‘射長 金世旭(사장 김세욱)’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사장은 사두의 다른 말로 사백(射伯)이라고도 불린다. 1899년 황학정 창건과 함께 사계를 조직하며 선출 혹은 임명된 첫 사두가 김세욱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순종이 즉위 이전 황학정 총재로 재임했다 하더라도 사정(射亭)의 운영을 이끈 사두의 존재를 확인시켜 준다.

<황학정도>에서 확인된 사두 계보의 오류가 「황학정사계규정」에서 또 확인된 것이다.

그러나 황학정은 오늘날까지 김세욱을 초대사두로 인정하지 않고 사두 계보에서조차 지워버렸다.

이 같은 오류의 배경에는 한국전쟁 와중에 사원 명단이 수록된 『좌목(座目)』이 소실됐고 일부 사원의 왜곡된 기억에 의존한 『황학정 백년사』 편집과정에서 확인되지 않은 계보를 작성했기 때문이라는 설명 외에 달리 이유를 찾기 어렵다.

특히 기록이 분명한 김세욱 사두와 달리 초대사두라고 기록된 나세환은 사두였다는 기록이 어디에도 없다. 더구나 「황학정사계규정」의 11명 임원명단에도 그의 이름은 빠졌다.

유추해 보면 김세욱 초대사두와 나세환은 모두 궁내부 내시였다. 특히 나세환은 고종의 총애를 받던 최측근이었고 당시 내시 조직의 양대 파벌이었던 관동파와 자하동파 중 자하동파를 이끈 2인방 중 한 명으로 알려지고 있다. 『황학정 백년사』 발간이 2001년으로 「황학정사계규정」이 공개되기 12년 전이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영향력 있는 내시가 초대사두였다는 누군가의 기억에 따라 만들어진 왜곡이 아닌가 짐작할 뿐이다.

「황학정사계규정」 표지(오른쪽)와 임원명단이 기재된 내지. 射長 金世旭(붉은 선 안)이 기록돼 있다.
「황학정사계규정」 표지(오른쪽)와 임원명단이 기재된 내지. 射長 金世旭(붉은 선 안)이 기록돼 있다.

성문영 사두 재임 기간인 1925년부터 1927년까지 사두로 재임했다는 김영배 역시 각종 대회에 참가하고 심판으로 선임됐다는 기록들은 발견되지만 사두였다는 근거는 역시 없다.

반면 엄주익(嚴柱益)·정행렬(鄭行烈) 사두의 기록은 당시 신문기사에서 확인된다.

2대 사두 엄주익은 매일신보 1916년 8월1일자 기사에 황학정 사두로 기록돼 있다. 신문기사는 경기 관덕회라는 모임의 회장 조중응이 숙환으로 요양차 금강산 온천리로 떠나기 전에 회원들이 황학정에 모여 환송회를 했는데 이때 엄주익 사두가 상품을 준비해 활쏘기를 했다는 내용이다. 그는 양정의숙(양정고등학교)을 설립하고 초대 교장을 역임한 인물이다.

엄주익의 뒤를 이어 정행렬 사두가 취임한다. 매일신보 1918년 5월28일자에는 웃대 황학정이 아랫대 청룡정과 도편사를 했는데 웃대 사두가 정행렬이라고 적고 있다. 엄주익이 사두였던 1916년 8월과 불과 2년이 채 되지 않아 그 사이 다른 이가 사두였을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정행렬 사두는 『조선의 궁술』 「역대의 선사」 편에 “고종 갑자(甲子)에 집궁(執弓)해 활쏘기로 이름이 널리 알려졌고 순종 갑자에 나이 80세인데 궁력(弓力)이 오히려 강해졌다”면서 “입사 후 만으로 60년이 돼 황학정에서 잔치를 열어 축하하니 이를 ‘집궁회갑(執弓回甲)’이라 한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는 1924년 12월20일 별세했다.

이처럼 기록상으로 확인된 황학정 사두 계보는 ‘초대 김세욱, 2대 엄주익, 3대 정행렬, 4대 성문영’으로 이어진다. 이때 현재 41대로 알려진 황학정 사두도 40대가 된다.

한편 현재 황학정 사두 계보에 기록된 나세환과 김영배는 민영환의 뒤를 이은 사계장으로 알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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