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주=고전연구가]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후백제 견훤과 고려 왕건의 신화를 비교해보면 권력의 욕망 속에 감춰져 있는 진실과 거짓, 즉 역사의 승자가 어떻게 자신의 신화를 만들고 또한 패자의 신화를 왜곡하는지 살펴볼 수 있다.
왕건의 할아버지는 작제건(作帝建)이다. 『고려사(高麗史)』 「고려세계(高麗世系)」를 보면 작제건은 활을 매우 잘 쏘았는데 어느 날 상선(商船)을 타고 가다가 바다 한가운데서 서해의 용왕이라는 노인을 만났다. 작제건은 그 노인의 부탁을 받아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의 꼴을 한 늙은 여우 한 마리를 활로 쏘아 죽였다.
작제건 덕분에 목숨을 보전한 노인, 즉 서해 용왕은 작제건을 자신의 딸과 결혼시켜 사위로 삼았다. 다시 말해 작제건은 서해 용왕의 사위가 된 것이다. 왕건의 아버지 왕륭은 바로 작제건과 서해 용왕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럼 당연히 왕건은 서해 용왕의 자손이 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이 서해 용왕의 사위가 된 신화와 똑같은 스토리의 설화가 『삼국유사』에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 설화는 『삼국유사』 「기이 제2」 편에 실려 있는 ‘진성여대왕과 거타지’ 설화이다.
신라 말기 진성여왕 시절 거타지 설화를 차용하고 변형하는 방식으로 고려 건국 신화를 창작하고 고려 왕조의 신성성과 정통성을 세우려고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럼 왕건에게 패배한 견훤의 신화는 어떻게 『삼국유사』에 남아 있을까.
“옛날 한 부자가 광주(光州) 북쪽 마을에 살고 있었다. 그에게는 딸 하나가 있었는데 용모가 매우 단아했다. 어느 날 딸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매일 자주색 옷을 입은 남자가 침실로 와서 관계를 맺곤 합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말했다. ‘네가 바늘에 실을 꿰어 그 사람의 옷에다 꽂아 놓아라.’ 딸이 그렇게 했다. 날이 밝자 북쪽 담장 아래에서 풀려나간 실을 찾았는데 실은 큰 지렁이의 허리에 꿰어 있었다. 그 후 딸이 임신을 하여 사내아이를 낳았다. 아이는 열다섯 살이 되자 스스로 견훤이라 일컬었다.”(일연 지음, 김원중 옮김, 『삼국유사』, 민음사, 2008, p213)
역사의 승자인 왕건의 신화가 서해 용왕의 자손으로 윤색(潤色)된 반면 패자인 견훤은 지렁이의 아들로 각색되었다. 너무나 대비되지 않은가.
만약 견훤이 역사의 승자였다면 어땠을까. 설령 자신이 지렁이의 아들이라고 해도 절대 지렁이의 아들이라고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반드시 자신의 출생을 신성시하고 신격화하는 윤색 작업을 했을 것이다. 왕건과 견훤의 경우는 권력의 욕망이 어떻게 신화를 윤색하고 각색하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이다.
그렇다면 권력의 욕망이 만든 신화는 단지 옛이야기에 불과할까. 아니다. 오늘날에도 권력은 신화, 즉 자신을 일반 사람과 다른 특별한 존재로 신격화하는 무수한 스토리를 제작하고 창작하고 있다.
오늘날 정치권력의 욕망이 만든 대표적인 신화가 이승만 신화와 박정희 신화라면 경제 권력의 욕망이 만든 대표적인 신화는 삼성의 이병철 신화와 현대의 정주영 신화이다.
이승만 신화는 그를 대한민국 건국 신화의 주인공으로 만들기 위해 창작된 이야기이다. 박정희 신화는 그를 한강의 기적을 이룬 경제성장 신화의 주인공으로 둔갑시키기 위해 창작된 이야기이다. 삼성의 이병철 신화와 현대의 정주영 신화 역시 재벌을 우리나라 경제성장과 발전을 이끈 주역으로 미화하기 위해 창작된 이야기이다.
이들 신화를 보면 우리의 삶 속에서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의 욕망이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엿볼 수 있다. 이승만 신화와 박정희 신화가 독재를 미화한다면 삼성의 이병철 신화와 현대의 정주영 신화는 재벌을 미화한다.
그리고 이들 신화는 자유와 인권을 억압하고 민주주의를 말살한 이승만과 박정희의 잔혹한 행적을 감쪽같이 감춰버리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불법을 저지르고 노동자를 착취‧탄압하고 심지어 죽음으로 내몬 삼성과 현대 등 재벌의 추악한 행적을 없었던 일인 양 왜곡해 버린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