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주=고전연구가] 인간의 삶은 ‘욕망하는 삶’이다. 욕망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수많은 힘 가운데 가장 강력한 힘이다.
그런데 욕망의 관점에서 인간의 삶을 들여다보면 신화보다 더 욕망하는 인간의 삶을 다양하게 보여주는 텍스트는 찾아보기 힘들다. 인간의 욕망이 만든 가장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이야기가 바로 ‘신화’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신화를 둘러싸고 있는 상징과 기호를 하나씩 하나씩 벗겨내면 인간의 삶 가장 깊은 곳에 숨어 있는 거의 모든 욕망을 들여다볼 수 있다.
신화는 권력의 신성성 혹은 신격화를 위해 창작된 경우가 다반사이다. 이러한 까닭에 신화를 생산하는 욕망 가운데 가장 강력한 원천은 권력의 욕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신화의 세계는 곧 ‘욕망하는 권력의 세계’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삼국유사』는 고려의 승려 일연이 고조선·부여·고구려·백제·신라·가야 그리고 통일신라와 후삼국 시대 우리나라의 신화와 설화를 엮어 편찬한 책이다. 여기에서 건국 시조와 역대 제왕의 신화를 소개한 「기이(紀異)」편이 가장 먼저 등장하고 또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이유 역시 권력의 욕망에서 찾을 수 있다. 권력의 욕망, 즉 권력을 신성시하고 신격화하고자 하는 욕망은 신화 제작과 창작의 가장 강력한 동인(動因)이기 때문이다.
고조선 건국 신화에서부터 부여와 고구려 건국 신화 그리고 신라와 가야의 건국 신화를 살펴보면 후대에 제작‧창작된 건국 신화가 이전 시대의 건국 신화를 계승하면서 어떻게 권력의 신성성과 신격화를 더욱 강화해나가는지 살펴볼 수 있다.
◇고조선 단군 신화
고조선의 건국 시조 단군 신화는 천자(天子), 즉 하늘의 자손이 지상으로 내려와 세상을 다스린다는 ‘천강(天降) 신화’로 이루어져 있다. 하느님 환인의 아들 환웅이 지상으로 하강해 인간 웅녀와 혼인한 다음 낳은 단군왕검이 세운 나라가 고조선이다.
◇북부여 해모수 신화
시간 순서로 고조선 단군 신화와 고구려 고주몽 신화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북부여 건국 신화 역시 ‘천강 신화’로 구성돼 있다. 북부여는 천제(天帝)가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흘승골성으로 내려와 세운 나라이다. 천제는 스스로 해모수라고 했다. 해모수는 해부루라고 이름한 아들을 낳았다. 이후 해부루는 상제(上帝 : 하느님)의 명에 따라 동부여로 도읍을 옮겼다. 해부루는 고구려의 건국 시조 고주몽이 어렸을 때 몸을 의탁한 동부여 금와왕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이때까지만 해도 건국 신화에는 ‘천강 신화’만 나올 뿐 아직 ‘난생 신화’는 등장하지 않는다.
◇고구려 고주몽 신화
고구려의 건국 시조 고주몽 신화에 와서는 ‘천강 신화’에 다시 ‘난생(卵生) 신화’가 덧붙여졌다. 강의 신 하백의 딸 유화가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와 정을 통하고 임신을 한 스토리는 전형적인 ‘천강 신화’이다. 그런데 유화는 사람을 낳지 않고 알을 낳았다. 고주몽은 알을 깨고 비로소 세상에 등장한다. 천신(天神)의 자손이 지상으로 하강해 인간 세상을 다스린다는 ‘천강 신화’는 권력의 신성성과 신격화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천강 신화’에 다시 ‘난생 신화’가 더해졌을까. 그것은 알이 지니고 있는 신성성과 상징성 때문이다. 고대 세계에서 알은 태초의 생명(력)을 잉태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성하게 여겨졌다. 또한 알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리고 나온다’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건국 시조는 낡은 세상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사람이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등장하는 “새는 알을 깨고 나오려고 투쟁한다. 그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누구나 하나의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유명한 구절 역시 신화의 세계에서 알이 지니고 있는 상징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렇듯 ‘난생 신화’는 권력의 신격화와 신성성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기존의 ‘천강 신화’에 새로이 덧붙여졌다고 하겠다.
◇신라 박혁거세 신화
신라의 건국 시조 박혁거세 신화 역시 ‘천강 신화’와 ‘난생 신화’가 결합돼 있다. 그런데 박혁거세 신화는 이전 단군의 ‘천강 신화’와 고주몽의 ‘천강 신화+난생 신화’를 계승하면서도 확연히 다른 특징을 띠고 있다. 단군 신화에서는 웅녀가 아이를 낳았고 고주몽 신화에서는 유화가 알을 낳았다. 두 건국 신화의 차이점이다.
하지만 두 경우 모두 여인의 몸을 통해 건국 시조가 탄생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박혁거세는 하늘에서 지상으로 하강한 천마(天馬)가 직접 가지고 온 알에서 탄생한다. 『삼국유사』에는 박혁거세 탄생 신화가 이렇게 기록돼 있다.
“전한(前漢) 지절(地節) 원년(기원전 69년) 임자년 3월 초하루에 여섯 부의 조상들은 각기 자제들을 거느리고 알천(閼川) 남쪽 언덕에 모여 다음과 같이 의논했다.
‘우리들은 위로 군주가 없이 백성들을 다스리기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방자하여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있다. 덕 있는 사람을 찾아 군주로 삼아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러고는 높은 곳으로 올라가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楊山) 아래 나정(蘿井) 옆에 번갯불과 같은 이상한 기운이 땅을 뒤덮었고 백마 한 마리가 꿇어앉아 절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찾아가 보니 자주색 알(혹은 푸른 큰 알이라고도 한다)이 하나 있었다. 말은 사람들을 보더니 길게 울고는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그 알을 깨뜨려 사내아이를 얻었는데, 모습과 거동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사람들이 놀라고 이상히 여겨 동천(東泉)에서 목욕을 시키니, 몸에서 빛이 나고 새와 짐승들이 춤을 추며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맑아졌다. 그래서 혁거세왕이라 이름하고 위호(位號)는 거슬한이라고 했다.” (일연 지음, 김원중 옮김, 『삼국유사』, 2008, p58〜59)
여인의 몸을 통해 태어나지 않고 직접 하늘에서 내려온 알에서 태어났다는 박혁거세 신화는 이전에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서사 방식의 건국 신화이다. 박혁거세가 천신(天神)의 직계 자손임을 한층 더 강조하기 위해 이러한 서사의 신화가 창작됐다고 할 수 있다.
단군 신화(천강 신화)를 근원으로 하는 우리나라의 건국 신화는 고주몽 신화(천강 신화+난생 신화)에 와서 한 번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리고 박혁거세 신화에 와서 건국 신화는 또 한 차례 크게 변화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여기에는 이전에 출현한 어떤 국가보다 신라가 신성하다는 신화적 메시지가 담겨 있다. 건국 신화의 변화는 권력의 신성성과 신격화를 더욱 더 강화하기 위한 욕망이 낳은 산물이다.
◇가야 김수로왕 신화
하늘에서 내려온 알에서 태어났다는 박혁거세 신화의 서사 방식은 후대 가야의 건국 시조 김수로왕 신화에서도 그대로 찾아볼 수 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의 김수로왕 탄생 신화를 읽어보자.
“후한의 세조(世祖)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18년 임인년(42년) 3월 계욕일에 그들(필자 주: 구간)이 살고 있는 북쪽 구지봉(龜旨峯)에서 사람들을 부르는 것 같은 이상한 소리가 났다. 그래서 무리 이삼백 명이 그곳으로 모여들었다. 사람의 소리 같았지만 형체는 보이지 않고 소리만 들렸다. ‘여기에 사람이 있는가?’ 구간들이 말했다. ‘우리들이 있습니다.’ 또 소리가 들렸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가?’ 구간들이 다시 대답했다. ‘구지봉입니다.’ 또 소리가 들려왔다. ‘하늘이 나에게 이곳에 내려와 새로운 나라를 세워 임금이 되라고 명하셨기 때문에 내가 일부러 온 것이다. 너희들이 모름지기 봉우리 꼭대기의 흙을 파내면서 ’거북아, 거북아, 네 목을 내밀어라. 만약 내밀지 않으면 구워 먹겠다.’ 라고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면, 대왕을 맞이하여 (너희들은) 기뻐 춤추게 되리라.’ 구간들은 그 말대로 하면서 모두 기쁘게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얼마 후 하늘을 우러러보니 자줏빛 새끼줄이 하늘에서 내려와 땅에 닿았다. 줄 끝을 살펴보니 붉은색 보자기로 싼 금합(金合)이 있었다. 그것을 열어 보니 해처럼 둥근 황금알 6개가 들어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기뻐서 허리를 굽혀 백 번 절하고, 얼마 후 다시 금합을 싸안고 아도간의 집으로 가져와 탑 위에 두고 제각기 흩어졌다. 12일이 지나고 이튿날 새벽에 여러 사람들이 다시 모여 합을 열어 보니 6개의 알은 어린아이로 변해 있었는데, 용모가 매우 빼어났다. 그들을 평상에 앉혀 절하며 축하하고 지극히 공경했다. 그들은 나날이 자라서 열흘 남짓 되자 키가 아홉 자나 되어 은나라의 탕왕과 같았고, 얼굴은 용과 같아 한나라의 고조와 같았고, 눈썹의 여덟 색채가 요임금과 같았고, 눈동자가 겹으로 된 것이 순임금과 같았다. 그달 보름에 즉위했는데 세상에 처음으로 나타났다고 하여 이름을 수로(首露) 혹은 수릉(首陵 : 죽은 후의 시호)이라 했다. 나라를 대가락(大駕洛) 또는 가야국(伽倻國)이라 부르니, 바로 여섯 가야 중 하나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각 다섯 가야의 임금이 되었다.”(일연 지음, 김원중 옮김, 『삼국유사』, 2008, p232〜233)
이렇듯 고대 국가의 건국 신화가 몇 단계에 걸쳐 변화하는 양상을 살펴보면 자신의 신성성과 신격화를 강화하고자 하는 권력의 욕망을 고스란히 엿볼 수 있다. 권력이 신성성과 신격화에 이토록 목을 매는 이유는 그것이 국가-제왕 권력의 정통성과 정당성을 확증해주는 바로미터이기 때문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