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주=고전연구가] 3세기 중반 이후 신라 왕위를 독점 세습한 경주 김씨 왕조의 시조 김알지에 관한 신화 역시 신화의 상징과 기호가 감추고 있는 권력의 야심과 욕망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먼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김알지 신화’를 읽어보자.
“영평 3년 경신년(60년) 8월 4일에 호공이 밤에 월성 서리를 지나다 시림(始林) 속에서 커다란 빛이 밝게 빛나는 것을 보았다. 하늘에서 땅까지 자줏빛 구름이 드리워지고 구름 속으로 보이는 나뭇가지에 황금 상자가 걸려 있었다. 상자 안에서 빛이 나오고 있었고 나무 밑에는 흰 닭이 울고 있었다.
호공이 이 사실을 왕에게 보고했다. 왕이 숲으로 가 상자를 열어 보니 사내아이가 누워 있다가 바로 일어났는데, 혁거세의 고사와 같았기 때문에 알지(閼智)라는 이름을 붙였다. 알지는 향언(鄕言)으로 어린아이라는 뜻이다.
왕이 알지를 수레에 싣고 대궐로 돌아오는데 새와 짐승이 서로 뒤따르면서 춤을 추었다. 왕이 길일을 가려 태자로 책봉했으나 나중에 파사왕에게 양보하고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 그는 금궤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김씨(金氏)로 했다.
알지가 세한을 낳고, 세한이 아도를 낳고, 아도가 수류를 낳고, 수류가 욱부를 낳고, 욱부가 구도를 낳고, 구도가 미추를 낳았다. 미추가 왕위에 오르니 신라의 김씨는 알지로부터 시작되었다.” (일연 지음, 김원중 옮김, 『삼국유사』, 민음사, 2008, p72〜73)
김알지 신화 속 상징과 기호의 핵심 키워드는 ‘황금 상자’와 ‘흰 닭’이다. 특히 ‘흰 닭’에 주목해야 한다. 황금 상자의 출현은 김알지가 외부에서 신라에 들어온 철기 문명 세력임을 암시한다. ‘흰 닭’은 김알지를 뿌리로 하는 경주 김씨 왕조 권력의 신성성과 신격화를 상징하는 기호이다.
신라 사회가 숭배하고 공경한 토템은 ‘닭’이었다. 『삼국유사』 「기이 제1」 ‘신라 시조 혁거세왕’ 편에는 “처음에 왕이 계정(鷄井)에서 태어났으므로 계림국(鷄林國)이라고도 했는데, 이것은 계룡(鷄龍)이 상서로움을 드러냈기 때문이다”고 기록되어 있다. 애초 나라의 이름이 계림(鷄林)일 정도로 신라 사회의 ‘닭’ 숭배는 뿌리가 깊었다.
닭은 “새로운 태양의 도래를 알리는 새”이다. 이 때문에 신화의 세계에서는 ‘닭’은 종종 암흑 세상에서 광명 세상으로의 변화, 즉 새로운 세상의 시작을 상징하는 기호로 등장한다.
그런데 왜 ‘흰 닭’일까. ‘흰색’은 예부터 신성하고 상서로운 동물 가운데에서도 가장 신성하고 상서로운 동물을 상징하는 색깔이다. 용 가운데 가장 신성하고 상서로운 용은 백룡(白龍)이다. 호랑이 가운데 가장 상서로운 호랑이는 백호(白虎)이다. 마찬가지 이치로 까치는 백작(白鵲), 사슴은 백록(白鹿), 소는 백우(白牛) 등이 그렇다.
이쯤 되면 신라의 토템이자 왕권의 상징인 ‘닭’ 가운데 가장 신성하고 상서로운 ‘흰 닭’이 김알지 신화에 등장하는 까닭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여기에는 김알지(또는 그의 후손)가 신라의 제왕 중에서도 가장 신성하고 위대한 인물임을 온 세상에 드러내고자 하는 김씨 왕조의 욕망이 숨어 있다.
또한 김알지 신화는 신라가 경주 김씨 왕조 대에 와서 제2의 건국을 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창작된 신화이다. 신라는 김알지의 후손인 미추왕에 와서야 비로소 경주 김씨가 왕위를 독점 계승하는 세습 왕조가 되었다. 이 때문에 무엇보다 경주 김씨 왕조의 정통성과 정당성을 강력하게 확증하는 신화가 필요했다.
김알지 신화는 이러한 배경에서 출현했다. 여타의 고대 국가와 다르게 신라에 두 개의 건국 신화가 존재하는 이유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