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준 인간 vs 실격당한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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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 인간 vs 실격당한 인간
  • 한정주 고전연구가
  • 승인 2023.07.24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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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인생수업]⑮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나는 ‘실격당한 인간’을 희망한다 Ⅰ
다자이 오사무와 『인간실격』 표지.
다자이 오사무와 『인간실격』 표지.

[한정주=고전연구가] 특정 시대와 사회 혹은 국가와 조직은 각자가 원하는 평균적인 인간 모델이 존재한다.

평균적인 인간 모델은 다르게 표현하면 ‘표준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다. 자본주의가 생산하는 제품의 적합과 부적합을 판단하는 기준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단어가 ‘표준’이다. 표준에 적합하면 합격, 부적합하면 불합격이다.

특정 시대와 사회·국가와 조직 역시 자신들이 원하는 인간 모델을 정해두고 적합과 부적합의 기준으로 인간을 훈육하고 양성한다. 이 훈육과 양성과정에서 기준에 적합하면 ‘표준 인간’이 되지만 기준에 부적합하면 표준의 자격을 상실한 인간, 즉 ‘실격당한 인간’으로 취급당한다.

실격당한 인간은 표준에 미달한 인간이기 때문에 그가 지닌 개별적·단독적 가치와는 상관없이 아무 쓸모도 없는 인간으로 전락하고 만다. 어찌 보면 우리의 삶은 국가·사회·조직이 원하는 표준 인간이 되기 위한 몸부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자신이 속한 국가·사회·조직에서 표준의 자격을 상실한 인간 혹은 아무 쓸모도 없는 인간, 즉 실격당한 인간 취급을 당하는 두려움과 공포야말로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힘 중 가장 강력한 힘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해방 이후 남북 분단 상황에서 국가와 사회는 앞장서서 근대화와 산업화를 부르짖었다. 이 시대 국가와 사회가 원하는 표준 인간은 ‘반공 전사’와 ‘산업 전사’였다. 이 시대 한국인은 누구도 예외 없이 모두 반공 전사와 산업 전사로 훈육되고 양성되었다.

가정·학교·사회·회사 어느 곳도 예외가 없었다. 반공이 뭐고 노동이 뭔지 몰라도 반공 전사와 산업 전사가 되지 않으면 국가 혹은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자격을 상실당해 불량 인간 취급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공포 때문에 우리는 그 시대 국가와 사회가 원하는 표준 인간이 되기 위해 얼마나 몸부림쳤는가.

1909년 태어나 1948년 자살로 생을 마감한 『인간실격』의 저자 다자이 오사무는 제국주의와 군군주의가 지배하던 시대 일본의 성공과 몰락의 한복판을 살다 간 사람이다. 이 시대 일본은 그 어떤 시대보다 국가와 사회가 강력하게 개입해 평균적 일본인, 즉 표준 인간을 집단적으로 훈육하고 양성했다.

미국 국무부는 태평양전쟁에서 결정적 승기를 잡은 1944년 6월 미군의 희생을 최소로 줄이면서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찾기 위해 문화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에게 한 건의 연구를 위촉했다. 루스 베네딕트는 당시 ‘에버리지 재패니즈(average Japanese)’, 즉 ‘평균적 일본인’의 행동과 사고의 틀을 연구했다. 그 결과물이 오늘날 일본인을 가장 객관적으로 분석한 고전이라고 평가받는 『국화와 칼』이다.

여기에서 루스 베네딕트는 평균적 일본인의 행동과 사고의 틀을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힘의 실체를 분석하고 있다. 그녀는 당시 일본 제국이 집단적으로 훈육하고 양성한 평균적 일본인, 즉 표준 인간의 모델을 두 가지로 정의한다.

그 하나는 황국신민(皇國臣民)이다. 즉 살아 있는 신(神)이라고 불리는 천황이 다스리는 일본 제국의 충성스러운 신민으로 일본인을 훈육·양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전쟁기계이다. 즉 일본 제국의 번영과 팽창을 위한 효과적인 전쟁 도구로 제 역할을 다하는 용맹한 전사(戰士)로 일본인을 훈육·양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때 황국신민과 전쟁기계는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천황이 다스리는 일본 제국에 충성스러운 신민일수록 천황의 나라 일본 제국의 번영과 팽창을 위해 더욱 용맹한 전쟁기계가 되기 때문이다. 황국신민과 전쟁기계의 결합이 낳은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가미카제(神風) 특공대이다.

다자이 오사무가 20세 전후 청년기에 접어든 1930년대 일본 제국은 군국주의와 전쟁국가로 광폭 질주하고 있었다. 일본인을 황국신민과 전쟁기계로 훈육·양성하기 위한 국가와 사회의 개입은 더욱 강력하고 치밀해졌다. 황국신민과 전쟁기계로서의 역할에서 벗어난 개인의 행동과 사고는 용납되지 않았다.

국가와 사회가 원하는 표준 인간에서 벗어나는 순간 아무런 쓸모도 없는 인간, 자격을 상실한 인간, 실격당한 인간으로 취급당한다는 두려움과 공포 때문에 그 시대 일본인은 스스로 황국신민과 전쟁기계의 삶을 철저하게 내면화했다. 국가와 사회가 원하는 표준에서 실격당한 인간은 조롱, 모욕, 배척, 혐오, 공격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신세를 모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일본인이 국가와 사회가 원하는 표준 인간, 즉 황국신민과 전쟁기계의 삶을 희망한 야만의 시대 한복판에서 오히려 다자이 오사무는 ‘실격당한 인간의 삶’을 희망했다. 다자이 오사무에게 황국신민과 전쟁기계의 역할을 강요하는 야만의 삶을 거부하고 부정하는 길은 오직 ‘실격당한 인간’의 삶을 희망하는 것밖에 없었다.

정신이 건전하고 육체가 건강하다면 국가와 사회는 그 사람을 끊임없이 황국신민과 전쟁기계로 길들이려고 한다. 국가와 사회의 욕망과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과 능력이 다자이 오사무에게는 없었다. 오직 자신의 정신과 육체를 파괴하고 타락시켜 국가와 사회가 자신을 황국신민과 전쟁기계로 훈육하고 양성하려는 의지를 포기하도록 만드는 것, 그 방법밖에는 없었다.

다자이 오사무가 자신의 삶을 온전히 자기 부정, 자기 파멸, 자기 몰락, 자기 파괴로 일관한 까닭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인간실격』은 ‘실격당한 인간’이기를 희망한 다자이 오사무의 자전적 성격의 소설이다. 그것은 모든 인간을 자신이 원하는 표준 인간으로 길들이고 지배하려고 하는 국가와 사회의 거대한 야만과 폭력에 맞서는 인간 존엄의 절규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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