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덫…사랑하지만 미워하고 미워하지만 사랑할 수밖에 없는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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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덫…사랑하지만 미워하고 미워하지만 사랑할 수밖에 없는 운명
  • 한정주 고전연구가
  • 승인 2023.07.17 0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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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인생수업]⑭ 에밀리 브론테 『폭풍의 언덕』…‘사랑한다’는 말의 의미Ⅴ
안드레아 아놀드 감독의 영화 폭풍의 언덕 중에서
안드레아 아놀드 감독의 영화 <폭풍의 언덕> 중에서

[한정주=고전연구가] 니체는 『선악의 저편』에서 “사람들은 결국 자신의 욕망을 사랑하는 것이지, 욕망한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고 말한다. ‘자신의 욕망을 사랑하는 것’이 사랑의 실체적 진실이라는 얘기이다.

히스클리프에게도 사랑이란 상대방에 대한 사랑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욕망에 대한 사랑일 뿐이다.

히스클리프는 복수심 때문에 에드거 린튼의 여동생 이사벨라 린튼의 마음을 빼앗아 자신을 사랑하게 만든 다음 결혼까지 한다. 사랑에 대한 히스클리프의 생각은 자신을 사랑한 이사벨라 린튼의 사랑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히스클리프는 이사벨라 린튼이 사랑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그녀의 욕망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자신에 대한 사랑 역시 그녀의 욕망이 만든 상상 속의 허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사벨라 린튼이 사랑한 히스클리프는 ‘히스클리프의 현실적 실체’가 아니라 ‘그녀의 욕망이 만든 히스클리프’에 불과하다는 얘기이다.

사랑에 빠지면 이성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말이 있다. 자신의 욕망이 이성의 눈을 가려버리기 때문이다. 결국 이사벨라 린튼 역시 히스클리프가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켜 줄 수 있다고 상상하기 때문에 그를 사랑한 셈이다. 그 상상에 집착할수록 사랑의 덫은 이사벨라를 더욱 옴짝달싹할 수 없도록 옥죄게 된다.

이사벨라 린튼의 욕망을 들여다봤기 때문에 히스클리프는 어렵지 않게 자신의 복수를 위해 사랑하는 척하며 그녀의 마음을 빼앗을 수 있었다. 그럼 히스클리프의 실체를 알게 되면 이사벨라 린튼은 사랑의 덫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아니다. 자신의 욕망이 만든 사랑이기 때문에 그 욕망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오히려 앞서 라캉이 말한 ‘욕망과 그 대상의 불일치’, 즉 히스클리프의 실재 모습이 자신의 욕망과 부합하지 않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사벨라 린튼은 더욱 더 강렬하게 히스클리프의 사랑에 집착하게 된다. 쉽게 말하면 미워하지만 사랑하고 사랑하지만 미워하는 덫에 빠지게 되고 만다.

“집사람은 잘못 생각하고 그러한 집과 가족을 버린 거지. 나를 로맨스의 주인공으로 상상하고는 내가 기사처럼 헌신적으로 무엇이든 바라는 대로 해주리라고 기대한 거야. 이사벨라는 이성을 가진 사람으로는 볼 수가 없어. 그렇게도 끈질기게 나라는 사람에 대해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고 그릇된 인상을 가지고 행동했으니 말이지.”(에밀리 브론테, 김종길 옮김, 『폭풍의 언덕』, 민음사, 2005, p245)

그렇다면 우리의 사랑은 이사벨라 린튼의 사랑과 다를까.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사벨라 린튼의 사랑과 우리의 사랑은 맥락상 무척 닮아있다. 우리 역시 각자의 욕망이 만든 상대방을 사랑하기 때문에 결국 자신의 욕망이 만든 상대방과 그 사람의 현실적 실체가 충돌하거나 어긋났을 때 그것을 그대로 인정하기보다는 실망하거나 좌절하거나 분노하거나 혹은 절망하지 않은가.

『폭풍의 언덕』 속 등장인물들의 폭풍과도 같은 사랑을 지켜보고 있으면 자신의 욕망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사랑은 결국 ‘미워하지만 사랑하고 사랑하지만 미워하는’ 사랑의 덫에서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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