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보다 더 저 사람을 사랑한다’는 말의 허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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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보다 더 저 사람을 사랑한다’는 말의 허구
  • 한정주 고전연구가
  • 승인 2023.07.10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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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인생수업]⑭ 에밀리 브론테 『폭풍의 언덕』…‘사랑한다’는 말의 의미Ⅳ
안드레아 아놀드 감독의 영화 폭풍의 언덕 중에서
안드레아 아놀드 감독의 영화 <폭풍의 언덕> 중에서

[한정주=고전연구가] 현실 세계에서 히스클리프의 캐서린 언쇼를 향한 욕망과 집착 그리고 캐서린 언쇼의 히스클리프를 향한 욕망과 집착은 결국 캐서린 언쇼가 에드거 린튼의 딸을 출산하다 산후 후유증으로 죽으면서 끝을 맺는다.

하지만 캐서린 언쇼를 향한 히스클리프의 욕망과 집착은 그녀가 죽고 나서도 사그라들지 않는다. 오히려 이때부터 캐서린 언쇼를 향한 히스클리프의 욕망·집착·복수의 드라마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히스클리프는 캐서린 언쇼를 잃어버린 뒤 자신의 삶은 단 두 마디, 곧 ‘죽음’과 ‘지옥’이라고 말한다. 이제 히스클리프는 귀신·영혼·유령의 존재로 캐서린 언쇼의 사랑을 상상하고 욕망한다.

“캐서린 언쇼! 당신은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편히 쉬지 못한다는 것을! 당신은 내가 당신을 죽였다고 했지. 그러면 귀신이 되어 나를 찾아오란 말이야! 죽은 사람은 죽인 사람에게 귀신이 되어 찾아온다면서? 난 유령이 지상을 돌아다닌다는 것을 알고 있어. 언제나 나와 함께 있어줘. 어떤 형체로든지, 차라리 나를 미치게 해줘! 제발 당신을 볼 수 없는 이 지옥 같은 세상에 나를 버리지만 말아줘. 아! 견딜 수가 없어! 내 생명인 당신 없이는 못 산단 말이야! 내 영혼인 당신 없이는 난 살 수 없단 말이야! … 알다시피 난 그녀가 죽은 뒤로 미치광이처럼 밤낮으로 늘 그녀가 내게 돌아오기를 빌었어. 영혼이라도 돌아오라고 말이야. 난 유령의 존재를 믿어. 유령이라는 게 이 세상에 있을 수 있고 또 있다는 것을 확신한단 말이야!”(에밀리 브론테, 김종길 옮김, 『폭풍의 언덕』, 민음사, 2005, p247, 480)

사랑하기 때문에 편히 놓아준다는 통속적인 말은 히스클리프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히스클리프의 사랑은 캐서린 언쇼의 안식보다는 충족되지 않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할 뿐이다. 오직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기 때문에 히스클리프의 사랑은 죽음조차도 어쩌지 못하는 참으로 지독한 사랑이다.

오히려 죽은 후에도 캐서린 언쇼가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켜줄 수 있다고 상상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귀신이 되어서라도 자신을 찾아올 것이라고 상상하기 때문에 그녀에 대한 히스클리프의 집착은 그녀가 살아있을 때보다 더 질기고 강렬한다.

그렇다면 다시 물어보자. 히스클리프는 캐서린 언쇼를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충족되지 않은 자신의 욕망을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심지어 히스클리프는 충족되지 않은 자신의 욕망에 대한 집착 때문에 캐서린 언쇼가 사랑한 주변 모든 사람을 파멸로 몰아넣고 파괴한다. 사랑에 대한 우리의 믿음, 다시 말해 사랑하는 사람의 모든 것을 사랑하고 자신보다 더 그 사람을 사랑한다면 캐서린 언쇼가 사랑한 모든 것을 히스클리프도 사랑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히스클리프의 욕망·집착·복수는 사랑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여지없이 배반한다. 히스클리프가 파멸로 몰아넣어 파괴한 인물을 꼽아보면 자기 세대에는 캐서린 언쇼의 오빠 힌들리 언쇼, 캐서린 언쇼의 남편 에드거 린튼, 에드거 린튼의 여동생 이사벨라 린튼 등이 있다.

또한 자식 세대에는 히스클리프와 이사벨라 린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린튼 히스클리프, 캐서린 언쇼와 에드거 린튼 사이에서 태어난 딸 캐서린 린튼 그리고 힌들리 언쇼의 아들 헤어튼 언쇼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캐서린 언쇼의 가족이자 친척으로 그녀가 사랑한 사람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폭풍의 언덕』 속 히스클리프의 사랑은 “나는 저 사람의 모든 것을 사랑하며 심지어 나 자신보다 더 저 사람을 사랑한다”는 말의 의미가 얼마나 허구적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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