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그녀)를 사랑하는 것일까 아니면 나의 욕망을 사랑하는 것일까?
상태바
그(그녀)를 사랑하는 것일까 아니면 나의 욕망을 사랑하는 것일까?
  • 한정주 고전연구가
  • 승인 2023.06.19 09:0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전 인생수업]⑭ 에밀리 브론테 『폭풍의 언덕』…‘사랑한다’는 말의 의미Ⅱ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영화 폭풍의 언덕 스틸컷.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영화 <폭풍의 언덕> 스틸컷.

[한정주=고전연구가] 우리는 어떻게 사랑에 빠지게 될까. 사랑은 내가 상대방을 욕망할 때 비로소 시작된다. 다시 말해 내가 욕망하는 것을 상대방이 지니고 있다고 상상할 때 사랑에 빠지게 된다.

이때 욕망은 외모일 수도 있고 성격일 수도 있고 재력일 수도 있고 권력일 수도 있고 교양일 수도 있고 능력일 수도 있고 취향일 수도 있다.

그 밖의 말로나 글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이라고 해도 결국 나의 욕망을 충족시켜줄 무엇인가를 상대방이 가지고 있다고 상상해야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이치는 매한가지다. 만약 상대방을 욕망하지 않는다면, 즉 나의 욕망을 충족시켜 줄 무엇인가를 상대방이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사랑은 결코 성립되지 않는다.

사랑의 희극과 비극은 항상 이 ‘욕망과 그 대상’ 사이의 일치 혹은 불일치에서 비롯된다. 즉 나는 그(혹은 그녀)를 욕망하지만 그(혹은 그녀)는 나를 욕망하지 않으면 사랑은 성립할 수 없다. 다시 말해 그(혹은 그녀)는 나의 욕망을 충족시켜 줄 무엇인가를 갖고 있지만 나는 그(혹은 그녀)가 욕망하는 것을 충족시켜 줄 무엇인가를 갖고 있지 않다면 그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될 수밖에 없다.

히스클리프와 캐서린 언쇼 사이의 비극 역시 ‘욕망과 그 대상 사이의 불일치’에서 비롯됐다. 히스클리프에게 캐서린 언쇼는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켜 줄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존재였다. 하지만 캐서린 언쇼에게 히스클리프는 자신의 욕망의 절반만을 충족시켜주는 존재였다.

즉 영혼의 욕망은 충족시켜주지만 현실의 욕망은 충족시켜 줄 수 없는 존재였다. 영혼의 욕망과 현실의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고 번민하던 캐서린 언쇼는 결국 에드거 린튼이 청혼한 바로 그날 자신의 속마음을 유모 넬리에게 모두 털어놓고 만다.

“저 방에 있는 저 고약한 사람(필자 주:오빠 힌들리 언쇼)이 히스클리프를 저렇게 천한 인간으로 만들지 않았던들 내가 에드거와 결혼하는 일 같은 것은 생각지도 않았을 거야. 그러나 지금 히스클리프와 결혼한다면 격이 떨어지지. 그래서 내가 얼마나 그를 사랑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그에게 알릴 수가 없어. 히스클리프가 잘생겼기 때문이 아니라 넬리, 그가 나보다도 더 나 자신이기 때문이야. 우리의 영혼이 무엇으로 되어 있든 그의 영혼과 내 영혼은 같은 거고 린튼의 영혼은 달빛과 번개, 서리와 불같이 전혀 다른 거야.”(에밀리 브론테, 김종길 옮김, 『폭풍의 언덕』, 민음사, 2005, p133)

캐서린 언쇼는 ‘나보다도 더 나 자신이고 그의 영혼과 내 영혼은 같기’ 때문에 히스클리프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캐서린 언쇼의 히스클리프에 대한 사랑은 소울메이트, 즉 영혼의 욕망이다. 영혼의 욕망에는 현실적인 욕망의 조건, 다시 말해 외모, 성격, 권력, 교양, 능력, 학벌, 신분 등의 조건이 붙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이 욕망은 무조건적이다.

하지만 캐서린 언쇼는 지극히 현실적인 욕망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히스클리프는 현실의 욕망에서는 그녀에게 격이 맞지 않는 남자이다. 그는 교육도 받지 못했고 교양도 없으며 재산도 없고 신분도 천하다. 반면 대지주 드러시크로시 저택의 상속자 에드거 린튼은 부유한 데다가 신분도 높고 교양도 있으며 무엇보다 신사의 품격을 갖추고 있다.

아마도 이 경우 대개 사랑이냐 욕망이냐 하는 이분법적 선택을 생각하겠지만 캐서린 언쇼에게 사랑과 욕망의 관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그녀에게 사랑은 곧 욕망이다. 캐서린 언쇼는 히스클리프도 사랑하고 욕망하며 에드거 린튼도 사랑하고 욕망한다.

그녀는 히스클리프와 에드거 린튼 중 한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을 욕망하는 자신의 마음을 모두 충족시키려고 한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캐서린 언쇼는 히스클리프를 사랑하는 것일까 아니면 에드거 린튼을 사랑하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욕망을 사랑하는 것일까?

“누가 우리를 갈라놓는단 말이야? 그따위들은 밀로(역자 주:고대 그리스의 폭군으로 압제를 견디다 못한 백성들에 의해 알피오스 강에 던져졌다)와 같은 꼴이 될 거야! 내가 살아 있는 한 나는 그를 버리지 않아. 엘렌. 그 누구를 위해서도. 린튼 가문의 사람이 지상에서 모조리 사라지더라도 히스클리프를 버릴 생각은 없어. 오, 전혀 그럴 생각 없어. 그럴 작정은 아니고말고! 그러한 희생을 치러야 한다면 나는 린튼 부인 같은 건 되지 않을 거야! 히스클리프는 예전에 그랬듯이 앞으로도 내겐 소중해! 에드거는 그를 싫어해선 안 되고 적어도 그에게만은 너그러워야 해. 히스클리프에 대한 나의 진정을 알면 그도 그렇게 할 거야. 넬리, 넬리는 나를 지독히 이기적인 계집애라고 생각하겠지만, 만약 내가 히스클리프와 결혼한다면 우리가 거지가 될 거라고 생각한 적 없어?”(에밀리 브론테, 김종길 옮김, 『폭풍의 언덕』, 민음사, 2005, p135)

그런 의미에서 캐서린 언쇼의 사랑은 자기모순과 자기 분열에 빠질 수밖에 없는 비극적인 운명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히스클리프에 대한 욕망과 에드거 린튼에 대한 욕망은 현실 세계에서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계속>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