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주=역사평론가] 『반계수록』은 토지 제도 개혁을 다룬 ‘전제(田制)’, 재정 및 상공업 개혁을 다룬 ‘전제후록(田制後錄)’, 교육 개혁을 담은 ‘교선제(敎選制)’, 관료 제도의 개혁을 다룬 ‘직관제(職官制)’, 녹봉제 개혁을 담은 ‘녹제(祿制)’, 국방 개혁을 담은 ‘병제(兵制)’, 지방 체제와 행정 개혁을 다룬 ‘군현제(郡縣制)’ 등에 이르기까지 일찍이 어느 누구도 감히 시도하지 못했던 정치·경제·사회·교육·국방·행정 등 모든 방면에 걸친 방대한 규모의 개혁서(改革書)였다.
여기에는 현실적인 국가 개혁 방안과 함께 미래 조선 사회에 대한 총체적인 전망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이 ‘조선 최고의 개혁서’라고 불리는 까닭은 무엇보다 경자유전(耕者有田)과 토지 공유제(土地公有制)를 근간으로 하는 농민 중심의 ‘토지 개혁’을 최초로 제기했다는 것이다.
조선과 같은 농업이 경제의 근본인 사회에서 개혁의 핵심 과제는 무엇보다 ‘토지개혁’이라고 할 수 있다. 토지의 소유 여부에 따라 정치적·경제적 권력의 향방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토지 제도가 허물어지고 사적으로 무제한 토지를 겸병(兼倂)함에 따라 나라의 모든 폐단이 생겨났다. 아무리 훌륭한 임금이라고 할지라도 토지 제도를 올바르게 하지 못한다면 나라와 백성을 제대로 다스릴 수 없다. 그렇다면 그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토지는 천하의 근본이다. 근본이 제대로 서면 모든 일이 저절로 잘된다. 그러나 근본이 제대로 서지 못하면 모든 일이 혼란에 빠지고 만다. 정치의 기본 요체를 깨우치지 못하면 하늘의 이치와 사람이 하는 일의 이로움과 해로움 그리고 얻음과 잃음이 모두 토지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반계수록』, ‘서문(序文)’
유형원은 토지 개혁을 통해 자신의 경작지를 소유한 자영농이 나라의 재정과 국방을 담당하는 부강한 조선의 미래를 그렸다. 토지 개혁으로 농민을 수탈하고 국가 재정을 좀먹는 양반 지주 계층을 근절시키고 자영농을 육성해 병농(兵農)을 일치시킨다면 백성의 생업과 나라의 정치는 안정되고, 재정은 풍부해지고 국방은 튼튼해져서 왜란과 호란 같은 외침(外侵)을 능히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우반동의 반계 가에서 세상을 개혁할 방향과 대책을 연구하고 집대성하는 동시에 성군이 자신을 찾아오기만을 기다렸던 유형원은 죽을 때까지 세상에 나오지 않고 초야에 묻힌 채 재야 지식인의 삶을 살았다.
유형원을 조정에 출사(出仕)하도록 하기 위한 여러 시도들도 있었다. 단적인 예로 현종 6년(1665년. 나이 44세) 조정의 정승들이 합의해 그를 벼슬자리에 추천한 일이 있었다. 하지만 유형원은 끝내 출사를 거부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재상들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재상들이 나를 안다고 하겠느냐?” 자신이 품은 개혁의 뜻을 펼칠 수 있는 세상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유형원은 자신의 뜻을 저버리면서 벼슬을 하느니 차라리 재야 지식인으로 살다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유형원과 같은 현인(賢人)이 나왔지만 이 현인을 중용해 나라와 백성을 위해 일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줄 성군(聖君)은 출현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이 필자가 ‘보수의 시대’라고 정의한 17세기 조선의 ‘비극’이었다.
비록 유형원은 초야에 묻힌 재야 지식인으로 살다 죽었지만, 그의 개혁사상은 다음 세기에 까지 이어져 빛을 발했다.
18세기 들어 우후죽순처럼 등장한 토지 개혁론, 즉 이익의 ‘한전론(限田論)’과 박지원의 ‘한전론(限田論)’ 그리고 정약용의 ‘여전론(閭田論)’과 ‘정전론(井田論)’ 등은 모두 유형원의 토지 개혁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유형원처럼 정치·경제·사회·문화·행정·교육·국방 등 다방면에 걸친 학문 연구와 개혁 사상을 펼친 정약용은 누구보다 『반계수록』을 숙독하고 깊이 탐구했다. 이러한 까닭에 정약용은 유형원이 뛰어난 식견과 경륜을 지녔음에도 산림 속에 묻혀 세상에 쓰이지 못한 것을 크게 한탄하기도 했다.
그런 정약용의 안타까운 심정을 보여주는 한 편의 시가 『다산시문집』에 남아 있다. 유형원이 우반동의 반계 가 거처에서 갈고 닦았을 큰 뜻과 원대한 목표를 엿볼 수 있는 시 편이다.
“세상을 다스리는 뜻이 진지하기로는 / 반계 유형원을 보았을 뿐이네 / 세상을 구할 큰 목표는 균전법에 있었고 / 천만 개의 그물눈이 서로 통했네 / 정확하고 세밀한 생각으로 틈새를 기워 가면서 / 뼈를 깎아 고치고 다듬고 가늠하려 애를 썼네 / 임금을 보좌할 만한 찬란한 재목이었지만 / 산림에 묻힌 채 늙어 죽으니 / 남긴 글 세상에 가득하지만 / 백성에게 혜택을 끼친 공적 이루지 못해 / 비명에다 그 사적 새길 만한데 / 말년에 모진 비난 한 몸에 받고 / 자손까지 아울러 고난을 겪네.” 『다산시문집』, ‘고시 이십사수(古詩二十四首)’중에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