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호(白湖) 윤휴③ 자연을 벗 삼아 웅장한 기상 품은 당당한 선비의 풍모
상태바
백호(白湖) 윤휴③ 자연을 벗 삼아 웅장한 기상 품은 당당한 선비의 풍모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1.29 08: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㉕
▲ 윤휴의 아들 윤하제·윤경제가 정리하고 8세손 윤신환이 목활자본으로 간행한 『백호집(白湖集)』

[한정주=역사평론가] 공주 유천에서 6년여의 세월을 보낸 윤휴는 1644년 나이 28세 때 마침내 아버지와 조상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여주(驪州)로 이사해 백호(白湖) 가에 거주지를 정하였다.

남한강이 관통하는 여주는 수로(水路)를 이용한 교통과 물류의 요충지로 예부터 비옥한 토지와 풍족한 물산의 고장으로 명성을 떨쳤던 곳이다. 백호(白湖)는 여주군 금사리에 있었는데, 이곳에 제방을 쌓기 전 금사천에 있던 호수였다고 한다.

백호 가에 자리를 잡고 거처한 윤휴는 여기에서 일생을 마칠 계획을 정하고 자신의 호까지 백호(白湖)로 삼았다. 그리고 토지를 관장하는 옛 관직의 명칭인 사토(司土)를 빌려 토지신(土地神)에게 고하는 축문까지 지어 올리며 비로소 평생을 거처할 정착지를 찾은 큰 기쁨을 한 없이 만끽했다.

“생각하건대 이곳 여구(驪丘)는 우리 선고(先考)께서 자리 잡으신 곳으로 이미 뽕나무와 가래나무가 있고 소나무와 잣나무도 심어 두었습니다. 세상이 혼란스러워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느라 집안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습니다. 이제 사토(司土)에 보답하려고 하니 이미 상서롭고 이내 모였습니다.

이 고을에 와보니 높고도 깊어서 바로 하늘이 주신 곳입니다. 이에 제 마음이 흡족합니다. 여주(驪州)의 산이 아득하고 여주의 강이 드넓은 이곳에 자리 잡아 침묘(寢廟)를 세웠습니다. 이미 침묘가 이루어져 비바람을 막을 수 있고, 노인은 봉양하고 어린아이는 기르며 시 외우고 책 읽을 수 있다면 제가 할 일 그것뿐 어찌 다른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감히 의지하거나 매달리지 않고 부러움에 허둥대지도 않고 이미 진실로 만족해 오늘 이곳에 들어왔습니다. 앞으로 사토(司土)께서 보우(保佑)해주시고 붙잡아주셔야 하기에 여기 변변치 못한 재물로 감히 밝게 섬기고자 합니다. 지금부터 영원히 경건하게 모시겠습니다. 『백호전서』, ‘백호의 새로운 터전에서 사토에게 고하는 축문(白湖新居告司土文)’

아울러 윤휴는 ‘백호신거기(白湖新居記)’라는 장문의 글을 써 자신이 이곳에 은거한 까닭과 마음속에 품은 큰 뜻을 한껏 드러냈다. 백호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 풍광과 그 속에 들어앉은 윤휴의 고고한 기상이 잘 묘사되어 있는 한 편의 걸작 산문이다.

“여주(驪州)는 기성(箕星: 동쪽)의 한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지형으로 보자면 등마루가 되니 국토의 상류에 위치해 있다.

북성(北城)을 베개 삼고 장강(長江)을 옷깃 삼아 빼어난 경치를 이루었다. 강물은 출렁출렁 넘칠 듯 흐르고, 산은 높고 수려하며, 들판은 넓고 평탄하다. 강의 상류와 하류에 이곳을 버려두고 손꼽을 곳이 없다. 북성을 떠나 강을 따라 내려가면 또한 하늘이 내게 준 곳 백호(白湖)를 만나게 된다. 주치(州治)와의 거리는 백 리도 되지 않아 서로 바라보일 정도다.

강의 근원은 오대산과 태백산의 봉우리에서 시작하여 굽어 돌고 꺾어져서 수 백 리를 달리다가 속리산의 물과 만난다. 여기에 이르러 충주, 원주, 음성, 이천 등 여러 고을의 물과 합해져 더욱 큰 물줄기를 이룬다. 이 물줄기가 큰 들판을 돌아서 천태(天台)를 물에 잠가 백호(白湖)를 만들었다.

천태의 시초는 진실로 원적산에서 나왔고, 원적산의 시초는 속리산에서 일어나 상당(上黨)을 거치고 태원(太原)을 경유하여 북쪽으로 상산의 서북쪽을 지나서 죽 연이어 오다가 황무(黃武)가 되었다. 다시 꺾여서 동쪽으로 달리다가 여기에 미쳐서 구불구불 뱀처럼 기어가는 지형을 이루고 백호(白湖)에 이르러 끝이 난다.

여주의 형세(形勢)가 대략 이와 같다. 남쪽으로는 충청도와 경상도를 바라보고 북쪽으로는 수도 한양을 가리키는데, 그 가운데 천태(天台)를 의지하고 백호(白湖)를 내려다보며 안은 깊숙하여 넓게 포용할 만하고 밖은 광활하여 큰 들판을 가로질러 마주하고 있는 곳에 바로 내가 거처하는 집이 있다.

갑신년(甲申年) 17년(1644년) 봄에 내가 처음 이 구역에 올라서 한숨 쉬고 감탄하면서 ‘아! 아름답구나! 이 어찌 하늘이 내게 주어 거처하게 한 곳이 아니겠는가. 어떻게 나보다 앞서 이곳을 얻은 사람이 없었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주위를 돌아보고 바라보니 우뚝하게 솟아올라 험준한 봉우리가 하늘 끝까지 닿아서 동북을 가로지른 것은 용문산의 높은 고개이고, 아득하게 드러나고 넓고 크게 내려와서 더러 돌아 흐르고 더러 곧게 흐르다가 뱉어내고 받아들이고 삼키고 내뿜으면서 동남쪽으로 호탕하게 넘실대며 흘러오는 것은 여강(驪江: 남한강)의 물줄기이다.

둥그렇게 포개어 감아 화산(華山)이 되고, 우뚝하게 일어나 원적산(元積山)이 되어 여주로 들어오는 형세는 마치 머나먼 길을 향해 달려 나가는 준마나 천리마와 같다. 멀리 있는 것은 월악산(月岳山)이고 가까이 있는 것은 우수산(牛首山)이다. 치악산(雉岳山)과 운악산(雲岳山)은 마치 난새가 날아오르고 봉황이 일어났다가 모여 있는 듯 하고, 북성(北城)·오갑(烏甲)·가섭(迦葉) 등 여러 산으로부터 죽 달려 내려오다 구불구불 돌다가 깎아질러 상두산(象頭山)이 되는데 높이 솟아 우뚝한 산세가 마치 주변 산천이 모두 자세를 낮추고 예를 갖춰 고개를 숙이는 듯하다.

이에 수많은 산들이 나는 듯 떠 있는 듯 서로 한데 모여 합쳐서 수 십, 수 백 리 안에 푸른 숲이 무성하게 우거져서 보였다가 숨었다가 하지 않는 것이 없다. 왼쪽은 용문산(龍門山)이고 오른쪽은 원적산(元積山)이며 앞으로는 장호(長湖)를 두르고 죽 늘어선 봉우리들을 굽어본다.

가시덤불을 베어 내고 무성한 수풀을 헤치고 집터를 잡아 내가 울타리를 치고 언덕을 쌓아서 무릎이나 간신히 넣을 만큼 작은 집 서너 칸을 짓고 겨우 비바람이나 막고 추위와 더위를 피할 곳으로 삼았다.

집 자리는 햇볕 드는 쪽을 향하고 그늘 진 곳을 등졌다. 그 샘물은 마실 만하고 그 토지는 곡식이 자랄 만하다. 소나무는 늙어서 어루만질 만하고 바위는 평평해서 앉을 만하다. 위로는 구름 이는 광대한 하늘을 바라보고 아래로는 넓고 깊은 호수를 마주본다.

구름과 안개가 열렸다 닫혔다 하고 안개비는 내뿜고, 눈과 달과 바람과 꽃은 해질녘과 아침 그리고 낮과 밤에 폈다가 움츠리고, 음양(陰陽)의 변화와 사계절의 기후,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갈매기와 백로, 곤새와 두루미의 우짖는 소리, 사람들과 어부나 상인들의 오고 가며 배회하는 모습 등이 무릇 한 눈에 들어와 움직이는 가운데 사람들의 기쁨과 즐거움은 물론 근심과 괴로움을 불러일으키고 느낄 수 있게 하는 것들이 또한 잠깐 동안에 수 만 가지로 변화하여 끝을 알 수가 없다.

용이 되었다가 봉황이 되었다가 논밭이 있다가 연못이 있어서 만 가지 형상을 마주하고 만 가지 소리를 들으니, 그 산은 만 겹이고 그 물은 만 길이나 된다. 그러니 이곳에 깃들어 휴식할 만하고 이곳에 들어앉아 숨을 쉴 만하다. 어찌 이곳을 곁눈질한 이가 없었겠는가 마는, 또한 아무도 그 땅을 만나지 못해 옛적부터 가려져오다가 지금에서야 드러나게 되었으니 혹시 이른바 ‘도(道)가 있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천명(天命)은 자못 기다림이 있다는 것으로 말미암아 나의 생애는 부족함이 없게 되었구나. 내가 무엇을 바라겠는가. 산에서는 고사리와 고비를 캐고, 물에서는 잉어와 쏘가리를 잡고, 무성한 나무를 어루만지며 큰 돌을 배회하기도 하고, 높은 곳에 올라서 먼 곳을 바라다보기도 한다.

이곳에서 노래하고 이곳에서 춤춘다. 이곳에서 누워 쉬고 이곳에 깃들어 마음껏 노닌다. 방 한구석에서 예(禮)를 외우고, 머리카락을 풀어헤치고 시(詩)를 읊다가, 거문고를 연주하고 글을 저술한다. 게다가 선왕(先王)의 도(道)를 노래하고 지내다 보면 나의 괴로움을 풀어내고 나의 일생을 끝마치기에 충분할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