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궤첨신한 시 검서체…실험과 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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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궤첨신한 시 검서체…실험과 창조
  • 한정주 기자
  • 승인 2021.11.15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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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무 詩의 온도](82) 영재 유득공
서울 종로 탑골공원의 원각사지 10층 석탑.
이덕무와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등 백탑파 시인들은 실험과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백탑은 서울 종로 탑골공원의 원각사지 10층 석탑을 말한다. 

나는 유득공의 시가 근세의 절품(絶品)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재주가 뛰어나고 학문도 박식하여 갖추지 않은 문체(文體)가 없다. 대가(大家)들의 시를 널리 보았기 때문에 모시(毛詩:시경)·이소(離騷)·고가요(古歌謠)·한(漢)나라·위(魏)나라·육조(六朝)·당(唐)나라·송(宋)나라·금(金)나라·원(元)나라·명(明)나라·청(淸)나라에서부터 삼국(三國:고구려·신라·백제)·고려·조선은 물론 일본의 시에 이르기까지 좋은 시는 직접 뽑아 기록했다.

그렇게 직접 뽑아 기록한 시가 상자 가득 넘쳤지만 오히려 시가 부족하다고 여겼다. 그의 재주가 절묘할 뿐 아니라 시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실력은 요즘 세상에서 비교할 만한 사람을 찾기 어려울 지경이다.

유득공의 숙부 기하실(幾何室) 탄소(彈素) 유금이 병신년(1776년) 부사(副使)를 따라 청나라 연경(燕京)에 갈 때 다음과 같은 전별시(餞別詩)를 지었다.

佳菊衰蘭映使車 고운 국화 시든 난초 사신 행차 비칠 새
澹雲微雨迫冬初 맑은 구름 부슬비 초겨울 재촉하네
欲將片語傳中土 한 편의 시 중국 땅 전하고파
池北何人更着書 지북(池北) 말고 어느 누가 책에 실어줄까

아래 시는 왕어양(王漁洋)의 『지북우담(池北偶談)』에 실린 청음 김상헌의 시사(詩事)에 대해 읊은 것이다.

看書淚下染千秋 책보다 흘린 눈물 천년 세월 물들이고
臨水騷人無恨愁 강가 부근 시인 감정 끝없는 수심일세
碻士編詩嫌草草 올곧은 선비 시집 엮는데 졸작을 꺼리니
豸靑全集若爲求 그대 나를 위해 『치정전집(豸靑全集)』 구해주소

아래 시는 치청산인(豸靑山人) 이철군의 시어(詩語)를 인용해 읊은 시다.

淺碧深紅二月時 싹 트고 꽃 피는 때는 이월
軟塵如粉夢如絲 작은 먼지 어지러이 봄꿈 어수선하네
杭州才子潘香祖 항주(杭州)의 재사(才士) 반향조(반정균)
可憐佳句似南施 가련하다! 아름다운 시구 남시(南施)와 같네

아래 시는 반추루(潘秋:반정균)의 도류화(桃柳畫) 족자에 쓴 시를 인용해 읊은 시다. 남시는 우산(愚山) 시윤장(施閏章)을 말한다.

有箇詩人郭執桓 시인 곽집환이 있는데
澹園聯唱遍東韓 담원서 읊은 시 우리나라까지 퍼졌네
至今三載無消息 삼 년이 지나도록 소식 조차 없으니
汾水悠悠入夢寒 유유히 흐르는 분수(汾水) 꿈속에 그리네

이 시는 홍담헌(洪湛軒:홍대용)이 회성원(繪聲園)의 시집을 얻은 일을 읊은 것이다. 유금이 청나라에 갔을 때 면주(綿州)에서 이부상서(吏部尙書) 이조원(李調元)을 만나 이 시를 보여주었다. 이조원은 크게 칭찬하며 “이것이야말로 훌륭한 문장이다”라고 말하며 벽에 붙여놓았다고 한다.

반추루(반정균) 역시 이 시를 본 후 칭찬했고 또한 자신의 시가 남시(南施)와 같다는 말에 기뻐하며 손수 베껴가지고 갔다고 한다. 이 밖에 유득공의 아름다운 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草色連南國 풀빛은 남쪽 나라에 이어져있고
鶯聲似故園 꾀꼬리 소리 고향 동산의 소리 같네

閒花多自落 고요히 피어있는 꽃 무수히 절로 떨어지고
風蝶竟分飛 바람 따라 나는 나비 마음대로 노니네

水流長太息 흐르는 물 보매 길게 탄식하고
花發自沈吟 꽃이 피매 절로 깊이 생각하네

晩浪涵花紫 꽃 떨어져 저녁 물결 붉고
春光湧月黃 달 솟아 봄 풍광 누렇네

舊煙流短草 묵은 연기 키 작은 풀에 흐르고
殘雨映高枝 남은 빗방울 높은 가지에서 떨어지네

峯靑雨黑際 봉우리 비 몰려올 무렵 푸르고
漁白樵紅時 늙은 어부 머리 횃불 밝힐 때 하얗네

煙屋澹詩意 연기 쌓인 집 시 정취 담담하고
雨樓沈讀聲 비오는 누각 글소리 잠기네

全樹霜鴉澹 나무 위 까마귀 깨끗하고
單枝雪雀肥 가지 위 참새 살쪘네

芳草汀洲人獨去 향기로운 풀 물가 사람 홀로 가고
畫船簫鼓雨俱來 놀잇배 악기 소리 비 함께 오네

新着靑燈高士傳 새로 등불 밝혀 고사(高士)의 전기 읽고
舊因紅樹隱君堂 오래된 단풍나무 기대어 은사(隱士)의 사당 지었네

龍升虎降參同契 용과 호랑이 오름과 내림 말한 책은 《참동계》이고
虫疏魚箋爾雅經 벌레와 물고기 주석과 해설 단 책은 《이아경》이네

別來幾日非吳下 작별한 지 며칠 만 오나라 땅 아닌데
知者無人又郢中 알아보는 사람 없으니 바로 초나라 땅이네

可憐木實能無患 가엾구나! 나무 열매인들 어찌 걱정 없을까
不信人名有莫愁 믿지 못하겠네! 사람 운명 근심 없다는 말

衣上多塵萱草怨 의복 위 먼지 많아 훤초(萱草) 원망하고
詩中有淚竹枝哀 시 속 눈물 젖어 대나무 가지 슬퍼하리

帆身半濕祖江雨 조강(祖江) 내리는 비 돛대 반쯤 젖었고
幡脚全斜孫石風 손돌목 부는 바람 깃발 완전히 기울었네

苔暗謝公携妓逕 사영운이 기녀 데리고 놀던 길 이끼 끼어 보이지 않고
葉飛孫楚讀書樓 손초가 글 읽던 누대엔 나뭇잎만 흩날리네

皓首郞潛悲漢駟 말단 관리로 늙어 가니 한(漢)나라 사신 서글프고
弊衣傭作歎梁鴻 해진 옷으로 품팔이한 양홍이 탄식하네

蘆花曲港魚三四 갈대꽃 핀 항구 물고기 서너 마리
浦葉寒塘雁弟兄 부들잎 떨어진 연못가 기러기 형제

이같은 시는 모두 깨끗해 세속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았다. 때로는 처절하고 비장한 심정까지 담고 있으니 유득공의 사람됨을 상상할 수 있다.

그가 지은 ‘가을날 강산 이서구에게 주다(秋日贈薑山)’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落拓塵間歲月催 더러운 세상에 떨어져 세월 쏜살같은데
登高能賦足云才 높은 곳에 올라 부(賦) 지으니 재사(才士)라 할 만하네
男兒可笑前頭事 사내대장부 앞으로 다가올 일 가소로울 뿐인데
今日胡無右手杯 어찌 지금 한 잔 술 없겠는가
原憲行歌非病也 원헌의 길가면서 읊은 노래 병(病) 아니고
東方聯句幾窮哉 동방의 시재(詩才) 거의 궁색하게 되었네
兩詩人對秋窓下 두 시인 가을 창가 아래 마주 앉았으니
霜信蕭蕭白雁來 가을 소식 쓸쓸한데 기러기 날아오네

유득공의 글은 문약해 마치 처녀 같은데 시는 때때로 애절함을 담고 있으니 그의 마음속에 혹시 격정(激情)이 있어서 그러한 것인가.(재번역)
『청비록 4』 p179

[한정주=고전연구가] 창조는 실험과 모험 속에서만 나온다. 실험과 모험이 없다면 창조 역시 없다는 얘기다. 창조를 위해서는 반드시 실험과 모험을 해야 한다.

이덕무와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등 백탑파 시인들은 실험과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실험과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궤첨신한 시, 즉 새롭고 혁신적이며 독창적인 시가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 이덕무는 박제가에게 편지를 보내 일찍이 실험과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자신들의 시작(詩作) 활동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대개 300편 시와 소부(騷賦)와 고일(古逸)은 물론 한나라와 위나라, 육조(六朝)와 당나라, 송나라, 금나라,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 그리고 신라와 고려와 우리 조선, 안남(安南)과 일본과 유구(琉球)의 시에 이르기까지 상하로 3000년, 종횡으로 만 리에 걸쳐 안력(眼力)이 닿는 곳은 남김없이 알아볼 정도였습니다. 감히 스스로 옛 사람들에게 양보할 바가 없다고 수없이 일컬었습니다. 간혹 일찍이 그 좋아하는 바를 본뜨거나 흉내 내고 시험 삼아 거리낌 없이 유희(遊戱)하기도 했습니다.”

옛 시를 배우고 익히면서 본뜨거나 흉내 내면서도 마음 내키는 대로 거리낌 없이 별도의 체재를 실험한 덕분에 이덕무와 그 벗들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새로이 ‘검서체’를 만들었다는 비평 아닌 비평을 받기도 했다. 유득공은 자신들의 시에 대한 세간의 비평에 대해 이러한 기록을 남겼다.

“나는 이덕무와 박제가와 더불어 상투를 틀 때부터 조계 백탑의 서쪽에서 시를 일컬었다. 당나라와 송나라와 원나라와 명나라만 고집하거나 가려서 보지 않았다. 그 뜻은 단지 온갖 부류의 시인들을 마음 내키는 대로 살펴보고 그 정화(精華)를 모으는 데 있었을 뿐이다. 규장각에 임금님을 받들어 모시고 나랏일에 힘쓰면서부터는 시작(詩作)의 여가조차 나지 않았다. 그런데 영편단구(零篇短句)가 간혹 세속에 물든 사람들의 눈에 걸리면 지나치게 정확하다거나 너무 깨끗하다고 의심하곤 했고, 드디어 마침내 ‘검서체’라고 지목했다.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다. 검서체라는 것이 어찌 다른 문체이겠는가? 안목을 갖추고 있는 사람은 마땅히 저절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덕무와 그 벗들의 기궤첨신한 시, 곧 ‘검서체’는 어디에서 왔는가? 첫째 모든 옛 시를 가리지 않고 배우고 익히지만 그 어떤 옛 시에도 결코 얽매이거나 속박당하지 않는 독립적인 정신에서 나왔다. 둘째 새로운 시를 거리낌 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실험하는 정신에서 나왔다. 그런 의미에서 독립 정신과 실험 정신이야말로 창조를 위해 갖추어야 할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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