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회(詩會)와 동인(同人)…서재문화 혹은 정자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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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회(詩會)와 동인(同人)…서재문화 혹은 정자문화
  • 한정주 고전연구가
  • 승인 2020.09.21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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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무 詩의 온도]㊻ 늦은 봄날 밤 관헌에서 모여
정수영, ‘송하가회(松下佳會)’, 1784년. 의관을 정제한 12명의 선비들이 소나무 숲 아래 조촐한 술상과 지필묵(紙筆墨)을 가운데 두고 둘러앉아 시작(詩作)을 하려 하고 있다.
정수영, ‘송하가회(松下佳會)’, 1784년. 의관을 정제한 12명의 선비들이 소나무 숲 아래 조촐한 술상과 지필묵(紙筆墨)을 가운데 두고 둘러앉아 시작(詩作)을 하려 하고 있다.

오거니 가거니 잇닿은 걸음 황혼은 짙어가고         步屧翩聯夕氣深
긴 연기 솟은 탑 외로운 봉우리 같구나              長煙塔湧等孤岑
화창한 계절 사람은 해가 되고                      暄和歲律人爲日
맑고 산뜻한 하늘 길 달은 사람 마음 닮았네         坦白天衢月似心
밀랍 촛불 눈부셔 잠 달아나고                      膩燭暈眸辭穩睡
더운 술 뺨에 올라 호방하게 시 읊네                煖醪騰頰證豪吟
살구꽃 필 적 새 겹옷 입고                         杏花時節裁新袷
약속대로 이름 높은 정자 차례차례 찾아보세         留約名亭取次尋
『아정유고 1』 (재번역)

소완정에서

맑고 푸른빛 먼 하늘 두루 퍼지고                   澹翠遙空遍
매미 소리 문득 퉁소 소리 하나 되네                蟬吟倏叶簫
어른 수염 머리털 예스럽고                         丈人須髮古
그윽한 정원 저녁바람 서늘하네                     幽院晩涼饒
『아정유고 2』 (재번역)

몽답정(夢踏亭)에서 함께 지음

무자년(1768년) 6월 그믐 나는 윤병현, 유운, 박제가와 함께 몽답정에서 쉬면서 참외 13개를 깎아 먹었다. 박제가의 소매를 뒤져 흰 종이를 얻은 다음 부엌에서 그을음을 다시 냇가에서 기왓장을 얻었다. 시가 이루어졌으나 돌아보니 붓이 없었다. 나는 솜대 줄기를 뽑아왔다. 윤병현은 운목(韻目)을 모아 놓은 서책의 못쓰게 된 종이로 노끈을 꼬았다. 유운은 돌배나무 가지를 깎았다. 박제가는 부들 순을 씹었다. 연꽃은 향기를 퍼뜨리고 매미는 울어대고 폭포는 물을 쏟아내는 가운데 시를 써내려갔다. 이때 동자(童子)가 옆에 있었는데 갑광과 정대가 바로 그들이다.

오묘한 연꽃 향기 고요한 마음 밝혀주고             荷香妙證寂然心
금붕어 아가미 놀리며 누각 그늘 노니네             紅鯽搖顋閣瓦陰
무성한 소나무 숲 방울방울 물소리                  古翠寒蕤林滴滴
한 줄기 하늘빛 개울 바닥 꿰뚫었네                 天光一線透溪深
『아정유고 1』 (재번역)

[한정주 고전연구가] 소설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시는 시회(詩會)나 동인(同人)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모임을 통한 창작 활동이 많다. 소설에 비해 시는 짧은 시간 안에 여럿 사람이 어울려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덕무와 그 벗들 역시 ‘백탑시사’라는 시회 혹은 시동인을 맺어 시작(詩作) 활동을 했다. 이덕무는 1766년 나이 26세 때 관인방 대사동(지금의 종로구 인사동)으로 이사를 오면서 박지원, 홍대용, 박제가, 이서구, 서상수, 유득공, 유금 등과 본격적으로 교류하며 창작의 꽃을 활짝 피울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주로 어디에서 모여 시를 지었을까. 백탑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자리하고 있던 서상수의 관재(관헌), 이서구의 소완정, 홍대용의 유춘오 또는 몽답정, 삼소헌, 청음루, 읍청정, 사인당, 군자정, 고원정과 같은 서재 혹은 정자가 바로 그곳이다.

17〜18세기 유럽에 새로운 문예사조와 지식혁명을 불러일으킨 진원지는 문학가와 지식인들이 모여 어울렸던 ‘살롱’이었다. 유럽의 ‘살롱’에 비견할 만한 조선의 문화 공간이 다름 아닌 ‘서재 혹은 정자’다.

유럽의 살롱이 ‘살롱문화’를 만들었다면 조선의 서재와 정자는 ‘서재문화’ 혹은 ‘정자문화’를 만들었다. 서재와 정자에서의 모임을 통한 공동의 창작과 연구와 토론이 새로운 문예사조와 새로운 이념과 사상을 낳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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