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도심에 자리 잡고 있으며 종로·동대문·대학로와 인접한 연지동·효제동은 다른 도심에 비해 다소 한적한 분위기와 시민들의 인지도도 낮은 지역이다.
그러나 이곳은 조선시대 북촌처럼 한양의 주요 주거지였으며 근대기에는 정동과 같이 선교기지가 조성된 근대화의 공간이었다.
서울역사박물관은 2006년부터 지속해 온 서울의 지역조사를 통해 2019년 연지·효제 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 결과를 담은 『연지·효제, 새문화의 언덕』 보고서를 지난 5월 발간했다고 10일 밝혔다.
조선시대 한양의 주거지는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북촌, 경복궁의 서쪽 서촌, 남산 자락 남촌, 장교와 수표교 일대 중촌이 있었으며 창덕궁과 종묘의 동쪽을 동촌(東村)이라 불렀다.
동촌은 종로에서 동대문으로 이어지는 길로 종로에서 동소문으로 이어지는 길의 인근에 위치해 있기는 했지만 주요 도로들은 동촌을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비껴가고 있었다. 곧 동촌은 번화함과 가까우면서도 외진 특이한 지정학적 특징을 지닌 곳이었다.
윤기는 자신이 직접 동촌에 지은 집의 상량문에서 “사람들은 서울 동쪽 고을에 짙푸른 초목의 기운이 울창하다”, “수레 먼지가 열 길을 치솟으며 시끌벅적한 일이 지척에서 벌어진다” 서술한 것으로 보아 동촌은 숲이 울창하고 매우 번화한 곳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동촌의 인물 중 빼놓을 수 없는 이는 바로 김효원(1542-1590년)이다. 김효원이 막강한 인사권을 쥔 이조전랑 자리를 두고 심의겸(1535-1587년)과 대립하면서 동서 분당이 시작됐는데 김효원이 동촌 연지동에 살았기 때문에 김효원을 따르는 이들을 ‘동인(東人)’이라 했고 심의겸이 서촌 정동에 살았기 때문에 심의겸을 따르는 이들을 ‘서인(西人)’이라 했다.
어의궁(본궁)은 1633년 봉림대군의 사저로 지어졌는데 맞은 편 낙산자락에는 그의 동생 인평대군이 거주하는 대궁이 있었다. 어의궁에는 중층 누각의 조양루가 있었고 대궁에는 석양루가 있었는데 조양루는 연화방의 야트막한 언덕 동쪽에 있었기에 ‘조양(朝陽)’이라는 이름을, 석양루는 낙산 서쪽 기슭에 있었기에 ‘석양(夕陽)’이라 이름 붙인 것이다.
어의궁(본궁)은 안동별궁이 지어지기 전까지 왕실의 가례공간으로 활용됐다가 점차 기능이 축소됐고 1900년대 초반까지 효제동 22번지에 있다가 사라졌다. 이화동 27번지에 있던 대궁도 장생전과 이재극의 별저로 사용되다가 1900년대 중반 소실됐다.
봉림대군(효종)은 볼모로 있던 심양에서 알게 된 왕이문 등 명나라 유민들과 함께 조선으로 돌아와 자신이 살고 있는 어의궁 인근에 명나라 유민들이 살 수 있는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명나라 유민들은 100여호의 집을 짓고 황조인촌(皇朝人村), 명인촌(明人村)을 형성했고 주로 군인 등의 관직생활을 했다. 왕이문의 후손이 소장한 『황조유민보』 등의 유물이 서울역사박물관으로 기증돼 연구자료로 활용됐다. 또한 명인촌에는 명나라 유민 외에도 1653년 조선에 표류한 하멜이 이듬해 서울의 명인촌 거주하였음을 그의 일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정동에 터전을 잡고 있던 개신교 북장로회는 경운궁 확장계획에 따라 부지를 대한제국에 매각하고 연지동 구릉지 일대를 매입했다. 이곳에는 1894년 연동교회를 시작으로 1895년 정신여학교, 1901년 경신학교가 지어졌고 1900년대 초반 선교사 주택이 건축되기 시작하면서 선교사촌을 형성했다.
연지동 전체의 60.5%인 1만8972평과 효제동 1430평에 형성된 대규모 선교기지였다. 당시 이 지역을 ‘선교사의 언덕’이라 지칭했다.
선교기지에 거주하는 딘(M. Lillian Dean), 하트니스 (Hartness E. Marion) 등 선교사들은 신의경 등 독립운동가들의 회의장소로 사택을 빌려준다거나 독립운동 서류들을 숨겨주는 등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1940년 북장로회의 선교사들은 일제에 의해 강제출국을 당했고 해방 후 선교사들이 다시 내한하면서 다시 회복해 나갔다. 그러나 선교기지는 해산돼 그 자리에 한국기독교회관 등이 건립됐고 1970년대 한국기독교회관은 독재정권과 맞서는 민주화운동의 거점으로 소위 ‘5가권’으로 불렸다. 현재 선교사 사택 1채만이 유일하게 남아있다.
1894년 연지동의 작은 초가에서 선교사 무어(S. F. Moore, 牟三悅)가 연동교회를 설립했으며 1900년 게일(J. S. Gale, 奇一) 목사가 부임하면서 이듬해 출석교인이 평균 1000명 정도로 크게 성장했다. 특히 연동교회는 천민 출신인 장로와 이명혁 목사 등이 큰 역할을 했으며 교인들 또한 대부분 인근 지역의 혜공·양혜공 등의 장인과 광장시장 등에서 일하는 상인들이었다.
1908년에는 효제동 47번지에 1000석 규모의 예배당을 건축했고 이후 몇 차례에 증축과 이주를 거쳐 현재도 같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1970년대 김형태 목사 재임기에 연동신용협동조합, 연동유치원, 근로청소년센터, 현희공예원 등을 설립해 지역사회, 산업청년을 위한 사업을 전개하였다.
정신여학교는 1887년 엘러스(Annie J. Ellers)가 정동의 제중원 사택에서 한 명의 고아에게 글을 가르치면서 시작됐고 정동여학당이라고 불렀다. 1895년 정동여학당은 정동에서 연지동으로 이전해 연동교회 옆에 교실과 기숙사용 ‘ㄱ’자 한옥을 구입하면서 학교 이름도 연동여학교로 바꿨다. 1910년 세브란스의 후원으로 화장실과 난방 등 신식 설비를 갖춘 본관 세브란스관을 건축했다.
한편 1919년 정신여학교 출신 오현주·오현관·이정숙 등이 3·1운동으로 투옥된 애국지사 옥바라지를 위해 혈성단애국부인회를 결성·활동하다가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와 통합,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설립하여 여성 독립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학교 본관 세브란스관 옆에 500년이 훌쩍 넘은 회화나무는 3·1운동 이후 대한민국애국부인회와 관련이 깊다. 일본 관헌의 수색을 받았을 때 비밀문서와 태극기, 금서였던 국사교과서 등을 이 나무의 빈 구멍에 숨겨 역사적인 자료를 남기게 한 유서 깊은 수목이라 하여 보호수로 지정돼 있다.
1978년 정신여학교는 사대문안 학교 이전 정책에 따라 잠실로 이전했고 본관 세브란스관은 일반 회사의 사무실로 현재까지 쓰이고 있다.
경신학교는 언더우드가 1886년 정동에 고아들을 모아 학당을 설립하면서 시작됐다. 초기에는 고아원학당 또는 학당장 이름을 따라 원두우학당·예수교학당·민로아학당 등으로 부르다가 1897년 폐교됐다. 1901년 게일이 연동교회 예배당 부속 가옥에서 신입생 6명으로 중등과정을 시작하면서 예수교중학교로 불리다가 1905년 경신학교(敬新學校)라 명명했다.
1930년대 일본의 신사참배 강요 문제가 발생하자 북장로회는 교육사업에서 철수해 정신여학교와 경신학교를 매각했다. 이 과정에서 정신여학교는 잠시 풍문재단에서 인수했다가 동창회의 지원으로 재개교했지만 경신학교는 1939년 안악 김씨 문중에서 매입해 1941년 정릉으로 이사했다. 현재 경신학교 부지에는 현대그룹빌딩이 들어서 있다.
연지동·효제동은 낙산자락에서 종묘까지 하나로 연결된 지역이었다. 일제강점기 시구개정사업으로 1931년 종로5가에서 혜화동을 관통하는 대학로가 신설됐고 1932년 광화문에서 종묘를 관통하는 동서도로인 종묘관통선이 개설됐다. 2개 도로의 신축으로 주변과 연지·효제의 연결성은 떨어졌지만 버스, 전차 등 교통망이 발달로 도시화가 촉진됐다.
일제강점기 김장철이면 맛 좋은 배추로 꼽는 것 중에 하나가 효제동·충신동에서 재배하는 경성배추였다. 또한 흥덕천 주변에는 미나리·호박 등 작물을 키우는 밭이 많았다. 그러나 1930년대 이후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주택부족현상이 심각해졌고 효제동·충신동 일대의 빈 땅은 도시한옥으로 개발됐다.
연지·효제 인근에는 실업학교들이 많았는데 실업교육을 실시한 경신학교를 비롯해 1907년 연건동에 설립된 공업전습소와 관립농상공학교(1906년)·경성고공(1916년)·경성의전 등이 있었다.
상인들이 많고 상·산업시설이 많은 연지·효제의 특성와 맞물려 실업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인근의 회사와 상점으로 취업을 하기도 했고 당시 공업촌으로 불리던 장충동과 쌍림동과 밀접해 있어 상호간 영향을 주기도 했다.
『2019 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 연지·효제, 새문화의 언덕』은 서울책방 홈페이지(https://store.seoul.go.kr)에서 구할 수 있다.
붙임 : 사진자료 21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