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많이 짓지 않은 박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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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많이 짓지 않은 박지원”
  • 한정주 역사평론가
  • 승인 2020.06.25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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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무 詩의 온도]㉖ 연암 박지원
연암 박지원과 그의 대표적 저서 『열하일기』
연암 박지원과 그의 대표적 저서 『열하일기』

연암은 문장에 있어서 창의력과 사고력이 가득 차서 넘쳐 흐를뿐더러 고금을 뛰어넘어 통달했다. 일시에 평평하고 원대한 산수(山水)에다가 그윽하고 깊은 감회를 소통하고 분산시키는 듯한 그의 시는 송나라의 서화가 미불(米芾)의 방에 들어가고도 남음이 있다.

마음이 가는 대로 글씨를 쓰기 시작하면 뛰어난 자태가 넘쳐나 기이하고 괴이한 모습이 세상 어떤 물건과도 비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일찍이 읊은 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짙푸른 물 청명한 모래 외로운 섬에       水碧沙明島嶼孤
해오라기 신세 티끌 한 점 없구나         鵁鶄身世一塵無

그의 시품(詩品) 역시 오묘한 경지에 들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만 자랑하는 것을 꺼려서 그 시를 밖으로 잘 내놓지 않는다. 마치 송나라의 청백리 포용도(包龍圖: 포청천)가 웃으면 황하의 물이 맑아진다는 말에 비유할 만큼 많이 얻어 볼 수가 없다.

이 때문에 함께 하는 사람들이 매우 아쉽고 한탄한다. 일찍이 내게 오언고시(五言古詩)를 준 적도 있다. 문장을 논할 때는 매우 광대하고 광활하여 가히 볼 만하였다.”
『청비록 3』 (재번역)

[한정주=역사평론가] 좋은 시를 찾아 모으는 일을 즐거워했던 이덕무는 박지원의 시가 많지 않다는 점을 매우 안타까워했다. 이덕무뿐만 아니라 주변 모든 사람들의 심정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왜 박지원은 시를 많이 짓지 않았을까. 그 까닭은 박지원이 시는 격식과 법칙, 운율과 성률에 구속되어야 하기 때문에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표현하는데 크게 적합하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박지원의 아들 박종채는 “이런 까닭에 아버지는 종종 시 한두 구절을 짓다가 그만두시곤 하셨다”고 증언하고 있다.

박지원은 마음속 하고 싶은 말을 자유분방하게 쏟아내는 데에는 시보다는 산문이 훨씬 더 유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산문 작업에 전력을 쏟았고, 이로 인해 현저히 적은 분량의 시만 남겼다고 할 수 있다.

18세기 조선은 ‘시의 시대’라기보다는 ‘산문의 시대’였다. 그 까닭은 첫째는 시보다는 산문이 더 크게 유행했기 때문이고, 둘째는 뛰어난 시인보다는 탁월한 문장가들이 훨씬 더 많이 나왔기 때문이고, 셋째는 시는 옛 시의 격식과 법칙 그리고 운율과 성률을 파괴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했지만 산문은 고문(古文)의 형식과 문체 그리고 소재와 주제를 파괴하는 데까지 나아갔기 때문이다.

문장에서는 거대한 혁신이 일어났다. 시에서도 혁신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문장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혁신의 깊이가 얕고 범위가 좁았다.

그렇다면 시와 산문에 대한 박지원과 이덕무의 태도는 어떤 점에서 같고 어떤 점에서 달랐을까.

박지원은 ‘산문의 시대’를 주도할 문장 혁신을 일으키기 위해 시를 버리고 산문에 집중하는 전략을 선택했다. 반면 이덕무는 산문은 물론 시에서도 혁신을 일으키기 위해 시와 산문 모두에 몰두했다.

이 때문에 이덕무는 비록 산문에서는 박지원을 뒤따랐지만 시에서만큼은 박지원도 따라올 수 없는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하고 독보적인 경지를 이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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