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직한 큰 덩치 밭가는 일 잘해 巨質塊然善起田
털 닿고 뼈 여윈 채 몇 해를 보냈는가 毛焦骨瘦幾經年
밤 오면 달 보며 바위 가에 우뚝 서고 夜來喘月巖邊立
봄 늦게 오면 구름 갈다 언덕 위에서 조네 春晩耕雲陌上眠
다리 굽혀 풀에 누워 북쪽 언덕 향해 울고 屈脚卧莎鳴北岸
머리 숙여 꼴 뜯고 앞개울 지나가네 垂頭囓草過前川
가련하다! 저 소 너무나 늙었으니 可憐此物形多老
아이들 듣거라! 함부로 채찍질 하지 마오 爲語兒童莫浪鞭
『영처시고 1』 (재번역)
[한정주=역사평론가] 놀이 삼아 혹은 장난 삼아 하는 창작이 가장 좋다. 인위와 가식이 섞이지 않은 자연스러운 글은 그때 나오기 때문이다.
이덕무는 창작의 지극한 경지를 가리켜 ‘천의무봉(天衣無縫)’이라고 했다. ‘천의무봉’은 선녀의 옷에는 바느질한 자국이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는 뜻인데 시문에서는 기교나 재주를 부려 꾸민 곳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자연스러운 상태를 말할 때 사용한다.
‘천의무봉’의 핵심이 바로 자연스러운 글쓰기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자연스러운 글쓰기가 창작의 지극한 경지인데 왜 놀이 삼아 혹은 장난삼아 창작하기가 힘든가. 목적의 노예가 되기 때문이다.
재물을 얻기 위해서든 권력을 얻기 위해서든 명예를 얻기 위해서든 출세를 하기 위해서든 혹은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든 목적이 있게 되면 인위와 가식이 섞이게 마련이다.
인위와 가식이 섞이는데 어떻게 자연스러운 글이 나오겠는가. 놀이처럼 혹은 장난처럼 글을 써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