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秋史) 김정희③ 금석역사가의 철학이 담긴 호 ‘추사(秋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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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秋史) 김정희③ 금석역사가의 철학이 담긴 호 ‘추사(秋史)’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4.11.06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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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㉑
▲ 문화재청이 복제해 2006년 10월 세운 북한산 비봉의 진흥왕순수비.

[한정주=역사평론가] 먼저 북한산 비봉의 진흥왕순수비에 대해 알아보자.

김정희는 31세가 되는 1816년 7월 김경연과 함께 북한산 승가사를 유람하다가 비문을 발견해 이끼를 벗겨내고 오랜 세월이 지나 이지러지거나 마멸되어 희미해진 글자들을 수차례에 걸쳐 탁본을 반복해 확인했는가 하면, 그 다음해인 1817년 6월8일에는 조인영과 함께 다시 그곳을 찾아가 비문 속의 글자를 하나하나 낱낱이 조사하여 68자를 구해 돌아왔고, 그 후 다시 두자를 더해 모두 70자의 글자를 얻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것을 진흥왕의 옛 비석으로 단정하고 나자 1200년의 고적(古蹟)이 하루아침에 환히 밝혀져서 무학대사의 비(碑)라는 황당하고 기궤한 설이 변파(辨破)되었다. 금석학(金石學)이 세상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 바로 이와 같다. 이것이 어찌 우리들이 밝혀낸 일개 금석의 인연에서 그치겠는가”라고 하면서 역사적 사실에 접근하는데 금석학이 얼마나 귀중하고 가치 있는 학문인지를 새삼 강조하기까지 했다.

김정희가 금석학적 연구를 통해 비로소 무학대사비로 잘못 전해져온 북한산 비봉의 비석이 신라 때 세운 진흥왕순수비라는 사실을 밝힌 것은 역사학적으로 볼 때 하나의 중대한 사건이었다.

“이상 신라 진흥왕순수비는 지금 한양도성의 북쪽으로 20리쯤 떨어져 있는 북한산 승가사(僧伽寺) 옆에 자리한 비봉(碑峯) 정상에 있다. 이 비석의 길이는 6척 2촌 3푼이고, 넓이는 3척에다 두께는 7촌이다. 바위를 깎고 뚫어서 밑받침으로 삼았고, 위에는 방첨(方簽)을 덮었는데, 지금 그 방첨은 벗겨져 아래로 떨어져 있다.

전자(篆字)로 쓴 비석의 전액(篆額)도 없고, 비석 뒷면에 새긴 음기(陰記)도 없다. 대개 비문은 12행(十二行)으로 글자가 희미하거나 명확하지 않아서 매 행(行)마다 몇 자인지도 분별하기 어려웠다. …

전체 비문 가운데 분별해낸 것이 70자(字)이다. 제1행이 12자, 제2행이 3자, 제3행이 4자, 제4행이 3자, 제5행이 7자, 제6행이 4자, 제7행이 3자, 제8행이 11자, 제9행이 11자, 제10행이 8자, 제11행이 4자이고 제12행은 희미하고 명확하지 않아 한 글자도 얻을 수가 없었다.

북한산은 한사군(漢四郡)의 강역이었으나 뒤에 고구려의 소유가 되었다가 진흥왕 시대에 이르러 신라에 소속되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본기(本紀)’에 의거하면, 진흥왕 16년에 왕이 북한산에 순행(巡幸)하여 영토의 경계를 획정하였고, 18년에는 북한산주(北漢山州)를 설치하였다. 곧 진흥왕이 새롭게 획득한 땅이었다. …

이러한 것으로 본다면 북한산은 신라와 고구려의 경계인데, 이 비석으로 곧 경계를 정하였다고 하겠다. 비문에는 연월(年月)이 닳아 없어져서 어느 해에 세워졌는지 알 수가 없다. …

이 비석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요승(妖僧) 무학(無學)이 잘못 찾아 이곳에 이른 비(碑)’라고 그릇되게 일컬어져왔다. 그런데 병자년(丙子年 : 1816년) 가을에 내가 김경연과 함께 승가사에서 유람하다가 이 비석을 보게 되었다. 비면(碑面)에는 이끼가 두껍게 덮여 있어서 마치 아무런 글자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손으로 비면을 문지르자 글자의 형태와 비슷한 것이 있었는데 더럽혀지고 이지러진 흔적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더욱이 그때 해가 이끼가 덮인 비면에 닿아서 비춰보자 이끼가 글자 획을 따라 들어가 ‘파임’은 꺾어지고 ‘삐침’은 더럽혀져 있었다. 이에 희미하게나마 글자를 찾아서 시험 삼아 종이를 대고 탁본을 떴는데, 글자의 형체가 황초령비와 매우 비슷하였다.

▲ 진흥왕순수비. 원래는 북한산 비봉에 자리하고 있었다. 보존을 위해 경복궁으로 옮겼지만 다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 현재 보관돼 있다.

제1행에 있는 진흥(眞興)의 진(眞) 자는 약간 닳아 희미했으나 여러 차례에 걸쳐 탁본을 떠서 살펴보니, 진(眞) 자라는 것을 의심할 까닭이 없었다. 이에 마침내 이것을 진흥왕의 옛 비석으로 단정하고 나자 1200년의 고적(古蹟)이 하루아침에 환히 밝혀져서 무학대사의 비(碑)라는 황당하고 기궤한 설이 변파(辨破)되었다.

금석학(金石學)이 세상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 바로 이와 같다. 이것이 어찌 우리들이 밝혀낸 일개 금석의 인연에서 그치겠는가.

그 다음해인 정축년(丁丑年 : 1817년) 여름에 또한 조인영과 함께 비봉에 올라 68자를 살피고 정한 다음 돌아왔고, 그 뒤 다시 두 글자를 얻어서 모두 합해 70자가 되었다. 비의 좌측에 ‘이것은 신라 진흥대왕의 순수비이다. 병자년 7월에 김정희와 김경연이 와서 읽다’라고 새기고, 또한 예자(隸字)로 ‘정축년 6월 8일 김정희와 조인영이 와서 남은 글자 68자를 살피고 정했다’라고 새겼다.” 『완당전집』, ‘진흥왕의 두 순수비를 상고한다(眞興二碑攷)’

젊은 시절 북한산 비봉에 세워져 있던 비가 무학대사비가 아니라 진흥왕의 순수비라는 사실을 처음 밝힌 김정희는 47세가 되는 1832년 함경도관찰사로 나가는 절친한 벗 권돈인에게 또 다른 진흥왕순수비인 함경도 함흥의 황초령비를 찾아가 탁본한 다음 자신에게 보내달라고 특별히 부탁했다.

예전에 외가 쪽 친척을 통해 구한 황초령비 탁본이 있었지만 실제 직접 현장에 가서 구한 탁본의 필요성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금석학에 대한 김정희의 열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던 권돈인은 함경도관찰사로 부임하자마자 황초령비를 다시 찾아내 탁본해서 김정희에게 보내주었다. 이후 김정희는 다시 진흥왕 순수비와 삼국사 관련 기록과 문헌을 깊이 연구했고, 마침내 ‘진흥왕의 두 순수비를 상고한다’는 뜻의 이른바 ‘진흥이비고(眞興二碑攷)’ 혹은 ‘예당금석과안록(禮堂金石過眼錄)’이라고 부르는 걸출한 금석역사학 논문을 썼다.

20대 중반부터 20여 년 넘게 지속적으로 이어져 온 김정희의 금석학과 역사학 연구가 비로소 큰 열매를 맺게 되는 순간이었다.

여기에서 김정희는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의 여러 탁본을 자세하게 소개한 다음 거기에 새겨진 글자를 해독하고 각종 역사서 및 문헌과 비교 대조해 고증·해석하고 “법흥(法興)이나 진흥(眞興)이라는 칭호는 왕이 사망하고 장사지낸 뒤에 칭한 시호(諡號)가 아니다. 이는 살아 있을 때 부른 칭호였다”라고 하거나 “지금 안변에서부터 함흥에 이르기까지 거리가 310리이고, 함흥에서부터 단천에 이르기까지가 3백 80리이니, 거리를 논한 것 역시 잘못되었다. 더욱이 단천에 진흥왕비가 있다는 명확한 증거를 보지 못했으니, 단천 이남의 땅이 신라로 꺾여 들어왔다는 말 역시 잘못되었다고 하겠다”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견해를 밝혀 하나의 역사 학설을 만들기까지 했다.

“이상의 신라 진흥왕순수비는 함경도 함흥부(咸興府) 북쪽으로 110리쯤 떨어져 있는 황초령 아래에 있었는데, 지금은 비가 없어져버렸다. 나는 단지 이단(二段)으로 되어 있는 탁본만을 얻었을 뿐이다. 이를 합해서 살펴보니, 12행으로 되어 있고 길이와 넓이는 알 방법이 없었다. …

이상 대개 12행인데, 글자가 완전한 것이 239자이고 불완전한 것이 13자였다. 또한 깎인 글자가 17자이고 빈 칸은 셋으로 총 272자였다. 비석의 상단은 이미 사라져버렸으니 그 규수(圭首)와 전자(篆字)로 쓴 비석의 전액(篆額)은 상세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북한산의 진흥왕순수비 또한 이 황초령의 진흥왕순수비와 동시에 세워진 것이지만 규수를 만들지 않았다. 이 황초령비 역시 북한산비와 동일한 사례일 것이다. …

신라왕의 시호(諡號)는 중엽부터 일어났고, 처음에는 모두 방언(方言)으로 호칭하였다. 그러므로 거서간(居西干)이라고 호칭한 것이 하나이고, 차차웅(次次雄)이라고 호칭한 것이 하나이고, 이사금(尼師今)이라고 호칭한 것이 열여섯이고, 마립간(麻立干)이라고 호칭한 것이 넷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의거하면 지증마립간(智證麻立干) 15년에 ‘왕이 사망하였다. 시호를 지증(智證)이라고 하였다. 신라의 시법(諡法)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왕이 사망한 뒤에는 반드시 시호를 썼다. 그러므로 진흥왕 본기(本紀)에도 역시 37년에 ‘왕이 사망하였다. 시호를 진흥(眞興)이라고 하였다’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이 비석은 진흥왕이 스스로 만들어 세웠는데 그 제액(題額)에 엄연히 ‘진흥대왕(眞興大王)’이라고 호칭했고, 북한산 비문에도 역시 ‘진흥(眞興)’이라는 두 글자가 있다. 이러한 것으로 살펴본다면, 법흥(法興)이나 진흥(眞興)이라는 칭호는 왕이 사망하고 장사지낸 뒤에 칭한 시호(諡號)가 아니다. 이는 살아 있을 때 부른 칭호였다. …

진흥왕 16년에 과연 북한산에 순수(巡狩)한 사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영토의 경계를 정한 일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역사서에서 빠뜨리고 기록하지 않는 것도 아닌데 어찌하여 이같이 누누이 여러 말을 잘못되게 늘어놓았는가. 지금 안변에서부터 함흥에 이르기까지 거리가 310리이고, 함흥에서부터 단천에 이르기까지가 380리이니 거리를 논한 것 역시 잘못되었다. 더욱이 단천에 진흥왕비가 있다는 명확한 증거를 보지 못했으니 단천 이남의 땅이 신라로 꺾여 들어왔다는 말 역시 잘못되었다고 하겠다.” 『완당전집』, ‘진흥왕의 두 순수비를 상고한다(眞興二碑攷)’

금석학과 역사학의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는 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공감할 것이다. 오늘날에도 금석(金石)에 새겨진 문자나 문양을 탁본(拓本)하고 다시 그것을 고증하고 해독·해석하는 일은 역사학도가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교양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 김정희가 제자 이상적에게 선물한 ‘세한도’

김정희가 학문적으로는 ‘금석문과 역사’에서, 또한 예술적으로는 ‘그림과 서예’에서 탁월한 대가였다는 사실은 그가 사망한 1856년(철종 7년) 10월10일자 『철종실록(哲宗實錄)』에 실려 있는 ‘김정희의 졸기(卒記)’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전 참판 김정희가 사망하였다. 김정희는 이조판서 김노경의 아들이다. 그는 총명하고 기억력이 뛰어나 여러 가지 책을 널리 읽었다. ‘금석도사(金石圖史)’ 곧 금석문과 그림과 역사에 깊이 통달했고, ‘초서(草書)‧해서(楷書)‧전서(篆書)‧예서(隸書)’ 등 서예에 있어서 참다운 경지를 신기하게 깨달았다.” 『철종실록』, 철종 7년(1856년) 10월10일

더욱이 김정희가 31세 때 지은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은 젊은 시절부터 금석학과 고증학과 역사학을 하나로 융합했던 김정희의 면모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다.

김정희의 학문 연구 방법이 실증과 고증과 변증이었다면 ‘사실에 의거하여 진리를 찾는다’는 실사구시(實事求是)는 그의 학문의 근저에 자리하고 있던 철학적 모티브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김정희는 어떤 학문과 사상이 올바르다거나 잘못되었다고 다툴 필요도 없이 학문하는 사람은 오로지 널리 배우고 견실하게 행동하면서 ‘사실에 의거하여 진리를 찾는다’는 말만을 주장하고 실천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한서(漢書)』 ‘하간헌왕전(河間獻王傳)’에서 말하기를, ‘실사구시(實事求是)’ 곧 사실에 의거하여 진리를 찾는다고 하였다. 이 말은 학문의 가장 중요한 도리이다. 만약 사실에 의거하지 않고 단지 공허하고 허술한 방도를 편리하다고 생각하거나, 그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단지 선입견(先入見)을 주된 것으로 삼는다면 성현(聖賢)의 도리에 배치(背馳)되지 않는 것이 없게 된다. …

학문하는 도리는 마땅히 사실에 의거하여 진리를 찾는 것에 있으니, 헛된 논설에 기대어 잘못된 곳에 숨어서는 안 된다. …

대체로 성현의 도리는 몸소 실천하면서 공론(空論)을 숭상하지 않는 것이다. 마땅히 진실한 것을 추구하고 헛된 것에 의거해서는 안 된다. 만약 아득하거나 어두운 속에서 이것을 찾거나 공허하고 광활한 가운데에서 이것을 방치한다면 옳은 것과 그릇된 것을 변별(辨別)할 수 없고 본의(本意)를 완전히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학문하는 도리는 한(漢)나라와 송(宋)나라의 경계를 구분할 필요가 없고, 또한 구태여 정현(鄭玄)과 왕숙(王肅) 그리고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장점과 단점을 따질 필요가 없다.

더욱이 주희(朱熹)와 육구연(陸九淵) 그리고 설선(薛瑄)과 왕수인(王守仁)의 문호를 다툴 필요가 없다. 다만 마음을 평온하게 하고 기운을 고요하게 다스려 널리 배우고 독실하게 행동하면서 사실에 의거하여 진리를 찾는다는 ‘실사구시(實事求是)’ 이 말만을 오로지 주장하며 실천해나가는 것이 옳다.” 『완당전집』, ‘실사구시설’

필자가 앞서 언급했던 공자의 『춘추』가 추구한 역사철학은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술이부작(述而不作)’ 즉 ‘서술하되 창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말은 ‘사실대로 기록할 뿐 임의로 지어내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술이부작’의 철학은 김정희가 역사적 실체와 진실에 접근할 때 철학적 모티브로 삼은 ‘사실에 의거하여 진리를 찾는다’는 이른바 ‘실사구시(實事求是)’와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다. 실사구시의 역사철학은 특히 근대 역사학의 새 장을 연 ‘실증주의 역사학’과 닮아 있다. 금석학과 역사학에 이 ‘실사구시’의 철학을 적용했던 김정희는 금석문에 남겨진 글자에 의거하여 역사의 실체를 찾고 또한 진실을 밝히려고 했다.

다시 말해 필자는 ‘추(秋)’라는 글자에는 ‘춘추(春秋)’라는 의미가 담겨 있고, 다시 ‘춘추’에는 김정희의 역사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 ‘술이부작’과 ‘실사구시’의 정신이 새겨져 있다고 본다.

따라서 ‘추(秋)’에는 진흥왕 순수비와 같은 금석문(金石文)의 옛 기록을 고증하고 해석하면서 그 시대의 역사적 실체에 다가가는 금석역사가(金石歷史家) 김정희의 모습이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다.

‘사(史)’에는 별다른 해석을 달 필요도 없이 ‘역사 혹은 역사가’의 뜻과 의미가 담겨져 있다. ‘추사’라는 호를 통해 우리는 금석학과 고증학과 역사학을 한 가지로 융합했던 김정희를 엿볼 수 있다.

따라서 ‘추사’가 담고 있는 의미는 곧 ‘금석서화가’보다는 ‘금석역사가’에 더 가깝다고 보아야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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