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주=역사평론가] 그런데 노론은 연잉군의 왕세제 책봉에 결코 만족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노론이 세운 다음 단계의 계획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왕세제의 대리청정이었다.

즉 노론의 영구 집권을 도모하기 위해 실제 권력을 왕세제에게 맡기고 경종을 ‘허수아비 임금’으로 만들겠다는 복안이었다. 더 나아가서는 아예 왕세제에게 임금의 자리를 넘기고 경종은 상왕(上王)으로 물러나도록 할 계획까지 세워두고 있었다.

그들이 왕세제 책봉의 명분이자 전례(前例)로 삼았던 정종과 태종의 관계를 좇으면 될 일이었다. 노론은 이 일 역시 왕세제 책봉 때처럼 힘으로 밀어붙일 작정이었다.

연잉군을 왕세자로 책봉한 지 채 두 달이 되지 않은 10월 초 이번에는 사헌부 집의 조성복이 앞장서서 왕세제를 나랏일에 참여시키도록 주청했다.

“전하께서 혹시 신료들을 면대하거나 정령(政令)을 재결하실 때 왕세제를 이끌어서 곁에 두셔서 정사(政事)에 참여토록 하십시오. 또한 옳고 그름을 헤아려 살피도록 하고, 이를 따라 가르치고 익힌다면 반드시 여러 사무를 밝게 연마해서 나랏일에 큰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경종이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이 상소의 숨은 뜻을 모를 리 없었다. 왕세제를 나랏일에 참여시키라는 요구는 곧 집권당인 노론이 자신들이 추대한 노론 당적의 왕세제를 중심으로 정국을 주도하겠다는 뜻이었다.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을 뿐이지 실상 ‘왕세제 대리청정’을 요청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럼 경종은 ‘임금을 허수아비로 만들겠다’는 이 불경(不敬)한 상소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을까?

“주청한 내용이 좋으니, 어찌 유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경종은 너무도 쉽게 조성복의 상소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땅거미가 질 무렵 자신은 이상한 질병이 있어 10여년 동안이나 고생했지만 회복될 기약이 없으므로 “크고 작은 나랏일을 모두 왕세제로 하여금 재단하게 하라”고 비망기(備忘記)를 내렸다. 왕세제 책봉 때와는 다르게 너무나 쉽사리 결판이 나버리는 바람에 노론의 신료들조차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자신들의 뜻한 바대로 일이 착착 진행되어갔기 때문에 노론은 쾌재를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경종이 왕세제에게 임금의 자리를 내놓고 뒷방으로 물러나도록 하는 일만이 남아 있었다.

노론은 곧 다가올 ‘장미 빛 미래’에 가슴 설레며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지금처럼만 순조롭다면 멀지 않아서 우리 노론의 영구 집권을 보장할 왕세제가 등극할 순간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그러나 권력욕에 눈 먼 노론의 독주(獨走)는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정치적 재앙’으로 끝을 맺고 만다. 연잉군의 왕세제 책봉 때 노론이 너무나 순식간에 일을 마무리지어버렸기 때문에 소론은 미처 손을 써볼 틈도 없이 당해야 했다. 뒤늦게 노론의 독단을 규탄하고 나섰지만 상황은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정이 달랐다.

소론은 더 이상 노론의 전횡을 좌시할 수 없었다. 노론에 대한 첫 반격은 당시 소론 계열의 좌참찬 최석항에게서 나왔다. 최석항은 ‘무고(巫蠱)의 옥(獄)’ 때 장희빈의 사사에 반대하고 세자 균(경종)을 보호하는 데 앞장섰던 최석정의 친동생이기도 하다. 그러한 이유로 그는 경종에 대한 충심과 의리가 남달랐다.

대리청정의 소식을 접한 최석항은 깊은 밤 궁궐로 들어가 경종에게 눈물을 흘리면서 ‘대리청정의 어명’을 거두라고 간청했다. 우의정 조태구와 더불어 소론의 수장 역할을 한 최석항의 간절한 청에 비로소 힘을 얻었던지 경종은 대리청정의 명을 거두어버렸다.

경종이 입장을 바꾸자 노론은 다음날 즉시 영의정 김창집이 사직을 청하는 것으로 반격했다. 그런데 경종은 두 말도 하지 않고 김창집의 사직소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틀 후에는 다시 왕세제에게 대리청정을 명했다.

오락가락하는 경종의 결정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노론으로서는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노론과 왕세제는 경종이 혹시 자신들의 속마음을 떠보는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이에 노론은 나흘 동안 어명을 환수해 줄 것을 청했고 왕세제 연잉군 역시 다섯 번씩이나 상소를 올려서 대리청정을 사양했다. 그러나 경종은 자신은 병 때문에 정사(政事)를 돌볼 수 없다면서 뜻을 꺾지 않았다.

이쯤에서 노론은 경종의 뜻이 다른 곳에 있지 않고 또한 자신들도 신하의 예의를 다했다고 생각했던지 ‘그렇다면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좇아 실행하겠다’는 속마음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결국 노론의 애초 계획대로 왕세제의 대리청정은 관철되었다. 그러나 노론과 왕세제는 ‘경종의 진심과 노림수’를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그 후 진행된 정국 상황을 지켜보면 경종이 무기력하거나 무능한 임금이 아니라 실상 ‘신중하게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임금’임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조정에서 노론 세력을 제거하는 정치적 반격의 본격적인 시작은 김일경을 비롯한 소론 강경파에게서 비롯되었다. 왕세제의 대리청정이 시작된 지 두 달이 되지 않은 12월 초순 김일경을 비롯한 소론 강경파는 전격적으로 ‘왕세제 대리청정을 앞장서 주청한 조성복과 노론의 4흉(四凶)을 법으로 처단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노론을 향한 ‘정면 승부’였다.

여기에서 지목한 4흉은 당시 노론의 핵심 지도부를 구성하고 있던 영의정 김창집, 영중추부사 이이명, 판중추부사 조태채, 좌의정 이건명이었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임금을 능멸하고 역심을 품은 적신(賊臣)이자 난적(亂賊)으로 몰린 노론은 즉시 소론 강경파의 공격에 맞불을 놓았다. 그런데 그동안 노론의 일방 독주에 그토록 무기력했던 경종이 소론 강경파에 큰 힘을 실어주는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상소를 주도한 김일경을 이조 참판에 임명한 것이다.

아울러 왕세제 책봉과 대리청정 과정에서 임금을 협박했다는 죄목을 앞세워 노론의 4대신과 핵심 인사들을 모두 귀양 보내거나 파직했고 지난날 ‘장희빈의 사사가 정당했다’고 주장한 성균관 유생 윤지술과 처음 왕세제 대리청정을 청한 조성복을 사형에 처했다.

이때 경종은 조정에서 노론 세력을 모두 내쫓고 소론을 불러들이는 ‘환국(換局)’을 단행했다. 이로써 1716년 병신처분(丙申處分: 소론이 완패한 숙종의 판결) 이후 권력을 독차지한 채 전횡을 일삼아 온 ‘노론 정권’이 무너지고 새로이 ‘소론 정권’이 들어섰다.

왕세제 연잉군 역시 지난 날 노론 정권의 핍박 속에서 왕세자 시절을 보내야 했던 경종처럼 이제 소론 정권의 핍박 속에서 왕세제 자리를 지켜야 하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했다.

그러나 노론과 왕세제의 ‘정치적 불행’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아니 불행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정작 재앙에 가까운 불행은 3개월이 지난 다음해 3월에 들이닥쳤다.

1722년 3월27일 남인 서얼 출신인 목호룡이 스스로 노론과 결탁해 경종을 살해하려 했다는 이른바 ‘고변(告變)’을 했다. 여기에는 이른바 ‘삼급수(三急手)’라고 불린 구체적인 경종 암살 계획이 드러나 있었다. 그것은 자객이 궁궐에 침입해 칼로써 임금을 죽이는 ‘대급수(大急手)’, 궁녀에게 독약을 주어서 임금이 먹는 음식물에 타도록 하는 ‘소급수(小急手)’, 환관을 매수하고 숙종의 유언을 조작해 임금을 폐출하는 ‘평지수(平地手)’였다.

이 목호룡의 고변은 조정과 사림에 엄청난 피바람을 몰고 왔다. 소론은 역모 죄를 다스리는 국청을 설치해 노론의 씨를 말려버릴 듯 기세를 올렸다. 당시 노론의 4대신을 비롯한 20여 명이 사형에 처해졌고 국문 도중 장살(仗殺)당한 자가 30여명, 유배형에 처해진 자가 114명, 연좌되어 죄를 입은 자가 173명에 달했다. ‘임인옥사(壬寅獄事)’라고도 불리는 목호룡의 고변 사건으로 노론은 정치적 치명상을 입어야 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문제는 국문(鞠問) 과정에서 왕세제 연잉군의 처조카 서덕수가 이 역모 사건에 연잉군이 가담했다는 사실을 자백하고 죽임을 당한 것이었다. 서덕수는 훗날 영조가 처음 ‘양위 선언’의 카드를 뽑아들 수밖에 없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영조 15년(1739년) 1월11일 영조는 갑자기 승정원에 비망기를 내려 다섯 살밖에 안 된 세자(사도세자)에게 양위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한 달 전 지난 경종 시절의 임인옥사(목호룡의 고변 사건) 때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한 처조카 서덕수를 신원(伸寃)한 일에 대해 당시 소론의 영수인 영의정 이광좌가 사직을 청하며 항의했기 때문이다. 서덕수에 대한 자신의 조치를 관철하고 소론의 반발을 제압할 목적으로 ‘양위 선언’을 한 것이다.

실제 영조는 서덕수에게 큰 마음의 빚을 지고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든지 그를 옥죄고 있는 역모 죄를 풀어 주고 싶었으리라. 이에 대해서는 이후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고 여하튼 졸지에 왕세제에서 역적의 수괴가 된 연잉군은 이제 목숨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역모의 혐의만 써도 죽임을 면키 어려운데 역모의 주모자 중 한 사람이 역모에 가담했다고 자백했으니 어찌 해볼 재간이 없었다. 특히 김일경 등 소론 강경파는 이번 기회에 아예 왕세제 연잉군마저 제거해 ‘화근의 싹’을 잘라버리려고 했다.

바람 앞에 촛불 신세가 된 연잉군이 믿을 사람은 이제 자신을 왕세제로 만들어준 대비 인원왕후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런 대비조차 연잉군에게 왕세제 자리를 내놓고 목숨이나 부지하라고 했다.

그러나 연잉군은 왕세제 자리에서 쫓겨나는 그 순간 바로 목숨을 잃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왕세제 자리를 지켜야 했다.

이때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구원의 손길이 다가왔다. 소론 강경파에 맞서 노론에 대한 합당하고 공정한 처분을 주장한 소론 온건파의 수장 영의정 조태구가 연잉군을 보호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소론 온건파의 지원에 힘입어 연잉군은 목숨은 물론 왕세제 자리까지 지킬 수 있었다.

더욱이 경종은 노론 세력을 단죄(斷罪)해 내쫓으면서도, 노론의 당적을 가진 왕세제만은 지켜주고 싶어 했다. 왜 그랬을까? 경종은 성품이 인자했고 형제애 또한 돈독한 인물이었다. 이건창의 『당의통략』에서는 그런 경종이 비록 이복동생이지만 세상에 단 하나 뿐인 혈육이었던 연잉군을 무척 사랑했다고 밝히고 있다.

“경종은 우애가 돈독했다. 그래서 항상 세제(世弟)를 보면 반드시 웃는 얼굴로 대했다. 때때로 친히 세제가 거처하는 동궁(東宮)으로 가서 우두커니 문밖에 서서 ‘우리 동생의 글 읽는 소리가 듣고 싶도다. 소론(少論)의 여러 신하들이 또한 다 진심으로 보호하여 동궁이 편안하구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우 사랑과 더불어 집권당인 소론과 노론 당적의 왕세제가 화합할 수 있도록 배려하려 한 경종의 마음씀씀이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연잉군의 왕세제 자리는 위태롭기 그지없었다. 당시 조정을 주도한 소론 정권이 어떤 꼬투리로 자신을 핍박해 내쫓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떻게든지 왕세제 자리를 보존하고 있으면 경종 사후 임금의 자리를 지키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경종 사후 왕위 계승권의 결정적인 열쇠를 쥐고 있는 노론 계의 대비 인원왕후가 든든하게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잉군은 하루하루를 두려움과 초조함 그리고 공포와 희망이 교차하는 생활을 보내야 했다.

이런 와중에 평소 잦은 병에 시달렸던 경종의 병세가 재위 4년을 막 넘긴 1724년 8월부터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악화되었다. 이때 연잉군은 경종의 진료를 담당한 의원들의 거듭된 반대에도 강압적으로 경종에게 세 가지 음식을 올렸다. 게장, 생감, 인삼차가 바로 그것이다.

의원들이 반대한 까닭은 다른 데 있지 않았다. 게장을 먹은 후 생감을 먹는 것은 의가(醫家)에서 가장 꺼리는 것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당시 의원이라면 누구나 읽고 공부했을 『동의보감』이나 『본초강목』과 같은 의서(醫書)에는 ‘게장과 생감은 상극(相剋)의 음식으로 함께 먹으면 구토와 설사가 심해지고 심하면 죽게 된다’고 되어 있다.

실제 이들 세 음식을 먹은 다음 경종의 병세는 더욱 심각해졌고 결국 8월25일 새벽 3시경 숨을 거두고 말았다. 연잉군의 이러한 행동은 이후 임금의 자리를 탐내 ‘이복 형(경종)을 독살했다’는 의혹과 비난을 사게 했다. 어떻게 손을 써 볼 겨를도 없이 창졸지간에 경종을 잃은 소론은 더욱이 연잉군이 경종을 독살했다고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경종이 사망한 지 닷새 째 되는 8월30일 ‘형을 독살했다’는 의혹과 비난 속에서 왕세제 연잉군이 조선의 제21대 임금으로 즉위하니, 그가 바로 영조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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