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주=역사평론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왕조 체제의 전복을 꿈꾼 조선사 최초의 인물이 허균이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 허균이 죽음을 맞은 1618년 보다 30여 년이나 이른 1580년대에 이미 ‘천하(天下)는 공물(公物)이므로 따로 주인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외치면서 왕정(王政)을 부정한 사람이 있었다.
원로 정치학자인 신복룡 교수는 그를 가리켜 ‘우리나라 최초의 공화주의자’라고 했고, 재야 역사학자인 신정일씨는 “영국의 올리버 클롬웰보다 50년 앞선 최초의 공화주의자”라고 까지 평가했다. 이 사람은 바로 죽도(竹島)라고 자호(自號)했던 정여립이다.
정여립은 1544년(중종 39년) 전라도 전주 남문 밖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나이 27세가 되는 1570년(선조 3년) 대과(大科)인 식년문과(式年文科) 을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섰다.
또한 이 무렵 경기도 파주에 머물며 강학(講學)하던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문하에 들어갔다.
일찍부터 유학의 경서(經書)는 물론이고 제자백가서에 두루 통달했던 정여립은 대단히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로 변론(辯論)에 능숙하고 박학다식해서 율곡과 우계의 신망을 얻었고 정치적 후원까지 받았다. 정여립의 앞날에는 정치적 출세 가도가 활짝 열려 있었다.
그러나 나라와 백성보다는 자신들의 당파를 더 중시하는 서인의 파당적 행태에 비판적이었던 정여립은 율곡이 사망한 후 서인을 떠나 동인(東人)이 되었고, 이듬해인 1585년(선조 18년) 4월 경연(經筵) 석상에서는 한때 스승으로 모셨던 율곡과 우계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이로 인해 조정과 사림 안에서 큰 논란이 일어났고 선조가 나서 정여립을 크게 질책하자 미련 없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버렸다.
낙향한 정여립은 고향집과 가까운 진안의 죽도(竹島)에 서실을 짓고 전국 각지에서 그의 명성을 따라 찾아온 사람들을 만났다. 또한 스스로 ‘죽도(竹島)’라는 호를 썼기 때문에 이때부터 제자들은 물론 호남 일대의 남녀노소가 모두 그를 ‘죽도선생(竹島先生)’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죽도는 ‘육지 속의 섬’이다. 금강 상류의 두 물줄기가 만나 사방을 에워싸고 흐르기 때문에 마치 섬처럼 보인다. 죽도 앞에 자리한 천반산에 올라 내려다 본 죽도의 모습은 절경 중의 절경이다.
또한 이곳에는 산죽(山竹)이 무성하게 자라서 한 겨울에도 하얀 눈 사이로 맑고 깨끗한 대나무 잎이 보인다고 한다. 죽도(竹島)라는 이름은 이러한 까닭에 붙여진 것이다.
눈보라 몰아치는 혹독한 겨울에 오히려 더욱 푸르른 기운을 발산하는 것이 ‘대나무’다. 아마도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이후 정여립은 부러질망정 결코 굽히지 않는 자신의 기개와 기상을 대나무를 통해 드러내고 싶었기 때문에 더욱 죽도(竹島)라고 자호(自號)했던 듯하다.
죽도(竹島)를 주요 무대로 삼아 활동한 정여립은 단순히 학문을 닦고 제자들에게 강론하는 일보다는 일종의 사회조직인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고 훈련시키는데 더 힘을 쏟았다.
그런데 그가 조직한 대동계는 당시 조선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신분 질서와 장벽을 깨뜨리는 매우 파격적인 형태를 띠고 있었다. 여기에는 양반사대부와 사림의 선비는 물론 서얼, 무사, 무뢰배, 노비, 승려, 도사, 산적들까지 참여했다.
정여립의 대동계는 당시 재지사림들이 성리학의 이념과 풍속을 확산시키기 위해 지방에 구성한 ‘향약(鄕約)’과 같은 향촌 사회조직들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대동계는 왕조체제와 양반사대부 중심의 신분 질서와 통치 때문에 굴곡진 삶을 살아야 했던 다양한 부류의 피지배 계층이 다수 참여하는 독특한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동(大同)’이라는 조직의 명칭 자체가 이미 어떤 신분 차별이나 사회적 불평등도 용인하지 않겠다는 ‘만민평등의 사상’을 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