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싣는 순서 ① 영조가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한 이유는? ② 재앙의 징조…나주 벽서 사건과 토역정시(討逆庭試) 사건 ③ 세자, 노론의 일당 독재에 맞서다! ④ 노론의 마지막 승부수…나경언의 고변 ⑤ 영조,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다 ⑥ 영조와 노론이 빚은 최악의 참극 - “권력과 왕위(王位)는 천륜(天倫)보다 우선 한다!” |
[한정주=역사평론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볼 때도 나경언이 고변한 몇 가지 허물 정도로 영조가 세자를 죽일 결심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영조가 세자를 죽여야겠다고 결심한 결정적인 이유는 세자가 무력을 동원해 정변을 일으키거나 혹은 다른 수단을 사용해 자신을 해칠 수도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나경언의 고변이 있던 날로부터 20여일이 지난 윤5월13일 아침 영조는 창덕궁으로 향했다. 부왕(父王) 숙종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선원전에 먼저 예를 갖춘 영조는 휘령전으로 향하면서 세자에게 나와 예를 행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세자는 병을 핑계대면서 나아가지 않았다. 휘령전이 어떤 곳인가?
그곳에는 영조의 첫 번째 왕비였던 정성왕후의 신주가 모셔져 있었다. 영조는 도승지 조영진을 특파해 다시 세자에게 예를 행하라고 재촉했다. 영조는 이어 세자궁을 지나는 도중에 차비관을 시켜서 자세하게 살피도록 했으나 세자는 보이지 않았다.
이날 영조의 거동을 지켜본 세자는 이미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래서 거듭된 영조의 명에도 병을 핑계 대며 따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영조의 엄명을 계속 어길 수는 없었다. 결국 세자는 집영문 밖에서 영조를 기다려 맞이하고서는 어가를 따라 휘령전으로 나아갔다. 영조는 행례를 마치고 세자가 뜰 가운데에서 사배례(四拜禮)를 끝마치자 갑자기 손뼉을 치면서 하교했다. 죽음의 의식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여러 신하들 역시 신(神)의 말을 들었는가? 정성왕후께서 정녕 내게 ‘변란이 호흡 사이에 달려 있다’고 일렀다.” 『영조실록(英祖實錄)』 38년(1762년) 윤5월13일
영조는 이어 협련군(挾輦軍)에게 명하여 전문(殿門)을 4∼5겹으로 굳게 막도록 한 다음 총관에게 배열해 시위(侍衛)하게 하면서 궁의 담쪽을 향해 칼을 뽑아들도록 했다.
또한 궁성문을 막고 각(角)을 불어 군사를 모아 호위하고 사람의 출입을 일체 금했다. 마치 정변이 일어났을 때 대궐을 호위하는 형세를 갖추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세자에게 땅에 엎드려 관을 벗게 하고 맨발로 머리를 땅에 조아리게 한 후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려 ‘자결할 것’을 재촉했다. 영조는 계속해서 세자를 폐해 서인으로 삼는다는 명을 내렸다.
‘사지(死地)’에 몰린 세자는 울음을 터뜨리면서 살려달라고 호소하면서 개과천선할 기회를 달라고 애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영조는 더욱 엄하게 하교하면서 “내가 죽으면 3백년 종사가 망하지만 세자가 죽으면 종사가 보존될 것이니 마땅히 자결하라”고 질타했다.
그렇다면 나경언의 고변이 있던 날로부터 20여일이 지난 시점에서 영조가 세자를 죽여야겠다고 결심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영조실록』에는 이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실마리가 될 만한 내용이 나온다.
나경언의 고변이 세자의 죽음에 크게 작용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영조가 결심을 굳힌 보다 직접적인 계기는 영빈 이씨(사도세자의 친모)의 고변이었다.
“나경언이 고변한 후 임금이 세자를 폐하기로 결심했으나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는데, 갑자기 유언비어가 안에서부터 일어나 임금의 마음이 놀랐다.” 『영조실록(英祖實錄)』 38년(1762년) 윤5월13일
갑자기 ‘유언비어가 안에서부터 일어났다’는 것은 곧 영빈 이씨가 고변한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세자에게 자결하라는) 임금의 전교는 더욱 엄해지고, 영빈이 고변한 바를 대략 진술했는데, 영빈은 바로 세자의 탄생모 이씨로서 임금에게 밀고한 자였다.” 『영조실록(英祖實錄)』 38년(1762년) 윤5월13일
영빈 이씨의 고변이 사실상 노론이 준비한 ‘최후의 일격’이었던 셈이다. 곧 영조가 세자를 자식이 아니라 자신을 왕위에서 내쫓고 심지어 죽일 수도 있는 정변이나 꾀하는 정적(政敵)이자 역적에 불과하다고 여기게끔 만드는 것이 노론이 노린 ‘세자 제거 음모’의 최후의 일격이었고,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긴 사람이 다름 아닌 세자의 탄생모(친모) 영빈 이씨였다는 것이다.
노론이 세운 ‘국시(國是)’를 지키고 권력을 유지하는 것은 이미 천륜(天倫)과 인륜(人倫)보다 더 우위에 존재하는 ‘지상 명령’이었다. 그것은 왕실 사람들도 예외일 수 없었다.
훗날 세자의 아내였던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을 지어 지아비를 미친 정신병자로 만들 수밖에 없었던 까닭 역시 노론과 운명을 함께 한 자신의 친정을 지켜내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자신의 친자식을 죽음으로 내몬 영빈 이씨의 행동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여하튼 영조는 자결하라는 명을 거듭 따르지 않자 마침내 세자를 뒤주에 가두었다. 세자는 이날로부터 윤5월21일까지 8일 동안을 뒤주 속에 갇혀 있다가 숨을 거두었다.
그런데 세자가 뒤주에 갇혀 있는 8일 동안에도 노론은 조정에서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소론의 씨를 아예 제거하는 숙청의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세자를 보호하려고 나섰던 조정 관료들 또한 하나 둘 씩 내쫓기거나 유배형에 처해졌다.
특히 세자가 나경언의 고변이 있은 이후부터 휘령전에 나아가기 직전까지 유일하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던 소론 영수 조재호의 제거는 노론이 낚은 가장 큰 ‘대어’였다.
춘천에서 은둔 생활을 하고 있던 조재호는 사도세자와 연락을 취했다는 이유 때문에 세자가 뒤주에 갇혀 사경을 헤매고 있는 동안 유리안치 형에 처해졌다가 그 뒤 한 달이 지나 마침내 사사(賜死)당하고 만다.
조재호의 죽음은 곧 정치 세력으로서의 ‘소론의 몰락’을 의미했다. 노론은 이렇게 해서 ‘노론 일당 독재’의 최대 장애물이었던 세자와 소론을 동시에 제거해버리는 ‘대 쾌거(?)’를 거둘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