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싣는 순서 ① 영조가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한 이유는? ② 재앙의 징조…나주 벽서 사건과 토역정시(討逆庭試) 사건 ③ 세자, 노론의 일당 독재에 맞서다! ④ 노론의 마지막 승부수…나경언의 고변 ⑤ 영조,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다! ⑥ 영조와 노론이 빚은 최악의 참극 - “권력과 왕위(王位)는 천륜(天倫)보다 우선 한다!” |
[한정주=역사평론가] 만약 세자가 대리청정을 하지 않았다면 나주벽서 사건과 토역정시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한 발 비껴서 있었을 것이다. 설령 소론의 편에 섰더라도 그냥 세자의 신분이었다면 노론의 표적이 될 정도로 확연하게 정치적 성향이 드러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대리청정하는 몸이었기 때문에 세자는 권력투쟁의 소용돌이 한복판에서 ‘당쟁의 포화’를 맞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대리청정이 사도세자의 죽음을 부른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 비극을 연출할 무대를 제공했다는 사실만은 부인하기 힘들다.
여하튼 노론은 나주벽서 사건과 토역정시 사건 이후 세자의 행실을 둘러싼 의혹과 비난을 끊임없이 유포시켰다. 성정(性情)이 포악해 짐승은 물론 사람까지 함부로 죽인다거나 주색(酒色)에 빠져서 여자들을 궁궐로 끌어들인다거나 혹은 정신병이 있다는 식의 세자의 비행(非行)과 관련한 소문들이 도성 안팎에 퍼져 나갔다.
더욱이 계속되는 노론의 정치 공세와 모함은 영조의 의심을 샀고 아버지와 아들 사이를 멀어지게 했다.
조정은 노론 일색이고 영조마저 자신을 멀리하는 상황에서 세자는 점점 더 고립되어 갔다. 세자로서는 정치적 돌파구 마련이 절실했다. 스스로 세자 자리를 지킬 대책을 어떻게든지 세워야 했다.
뒤주에 갇혀 죽기 1년 전인 1761년(영조 37년) 4월 초 세자가 결행한 관서행(關西行)은 곧 자신을 보호할 정치적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상황과 관련해서는 훗날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행적(行蹟)에 대해 쓴 ‘어제장헌대왕지문(御製莊獻大王誌文)’의 기록을 살펴볼 수 있다.
“신사년(辛巳年 : 영조 37년)에 당시에 조치해야 될 계책에 대해 대신들에게 문의했는데 대답하지 못했다. 드디어 관서(關西)의 고을에 행차하게 되었는데, 이는 상(上 : 영조)에게 명을 청해 도적들의 모의를 저지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적신(賊臣) 홍계희가 내부에서 변란을 저지르려 하자 세자가 그 소식을 듣고 말을 재촉해 곧장 돌아왔다.
이때 한 승지가 상(上 : 영조)에게 아뢰어 조정 신하가 세자에게 올린 글을 볼 것을 청했다. 이에 사태가 급박하게 되었는데 세자께서 몸소 임금 앞에 나아가 변란을 처리하려 했던 본의(本意)를 빠짐없이 고했다. 상(上 : 영조)이 그때서야 의심을 풀었다.
이후 세자가 빈연(賓筵)에 자리하셨을 때 상(上 : 영조)이 ‘세자 또한 임금이다. 명색은 신하로서 섬긴다고 하면서 간악한 음모를 품어서야 되겠는가’ 하고서는 잇달아 역적 홍계희가 무엄하다는 내용의 하교를 내리고 한무제(漢武帝) 때의 간신 강충에 비교하셨다. 이때로부터 음모가 더욱 긴박해졌다.” 『정조실록(正祖實錄)』13년(1789년) 10월7일
이 기록의 행간을 읽어보면 노론 홍계희가 세자의 관서행(關西行)을 두고 ‘세자가 변란을 도모하려 한다’고 영조에게 고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세자는 노론이 자신을 제거할 계획을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 부리나케 궁궐로 돌아와서 몸소 영조 앞에 나아가 ‘변란을 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변란을 처리하려 했다는 것’을 아뢰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정조는 이 사건이 있은 다음에 노론의 ‘세자 제거 음모’가 더욱 긴박하게 진행되었다고 했다. 이러한 정황들이 말해주고 있는 진실은 무엇일까?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먼저 정조의 기록대로 세자가 변란 모의를 제거하기 위해 관서행(關西行)에 나섰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해석은 세자가 왜 구태여 영조에게 자신의 행동을 숨겼느냐는 의문을 갖게 한다. 또한 당시 정보망이 치밀했던 노론 세력이 문제를 삼기 힘든 세자의 행동을 두고 영조에게 ‘변란’ 운운하는 고변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다른 해석은 자신을 보호할 정치적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곧 만약의 사태에 대비할 수 있는 ‘정치 세력’을 규합할 목적으로 관서행에 나섰을 가능성이다. 노론 세력이 영조에게 고한 내용이나 세자가 다급하게 돌아와서 영조에게 몸소 자신의 행동을 변명한 것, 아울러 이때부터 노론이 더욱 긴박하게 움직였다는 정조의 기록은 모두 당시 세자가 관서행을 통해 ‘모종의 정치 행동’을 했음을 암시한다.
여하튼 관서행을 세자 제거의 다시없는 기회로 삼으려고 했던 계획이 오히려 영조의 세자에 대한 의심을 누그러뜨리는 역효과를 내자 노론은 더욱 서두르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론이 ‘마지막 승부수’로 꺼내든 카드가 세자의 10여 가지 비행(非行)을 고발한 ‘나경언의 고변’이었다.
참혹한 권력욕이 연출한 조선 왕조사 최대의 비극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사도세자의 죽음’은 바로 이 나경언의 고변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762년(영조 38년) 5월22일 나경언이라는 자가 형조에 영조 주변의 ‘내시들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고변을 했다. 당시 형조참의 이해중은 이러한 사실을 영의정 홍봉한(세자의 장인)에게 알렸다. 홍봉한이 영조에게 알리지 않을 수 없다고 하자 이해중은 세 차례나 대면을 청해서 나경언의 고변을 아뢰었다.
영조는 크게 놀라 상을 치면서 “변란이 어깨와 겨드랑이 사이에 있으니 친국(親鞫)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이때 경기감사 홍계희가 입시해 있다가 영조에게 호위할 것을 권했다. 그러자 영조는 성문과 아래 대궐의 여러 문을 닫으라고 명했다.
나경언의 고변에 실린 내용을 읽은 영조가 이것을 이인좌의 난이나 나주벽서 사건 및 토역정시 사건 때처럼 역모 곧 변란으로 해석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친국장에서 나경언은 옷 솔기에서 다시 영조에게 고변서를 내놓으면서 “대궐의 천폐(天陛: 임금)에 올리고자 했으나 올릴 길이 없어 우선 형조에 원서(原書)를 올려 계기를 삼았습니다”라고 했다. 영조는 이 고변서를 다 읽지도 못하고 손으로 문미(門楣)를 치면서 “이런 변이 있을 줄 염려했다”면서 크게 분노했다.
이때 나경언이 올린 고변서에는 세자의 허물과 관련한 10여 가지의 내용이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그러나 이 고변서는 당시 모두 불태워져버렸기 때문에 현재 그 내용의 전모를 알 길이 없다. 다만 『영조실록』에 남아 있는 일부 기록을 통해 추측해볼 수 있을 뿐이다.
나경언의 고변서에 관한 소식을 들은 세자는 즉시 보련(步輦)을 타고 대궐로 나와 홍화문에 나아가 엎드려 대죄했다.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 채 무조건 죄를 청하는 것이 세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이때의 시각이 2경(二更 : 밤 9시∼11시)이었다. 영조는 친국을 하던 대궐의 뜰로 세자를 불러들여 크게 책망했다.
“네가 왕손의 어미를 때려죽이고 여승을 궁으로 불러 들였으며 서로(西路: 관서)에 행역하고 북성(北城)으로 나가 유람했는데, 이것이 어찌 세자로서 행할 일이냐? 사모를 쓴 자들은 모두 나를 속였으니 나경언이 없었더라면 내가 어찌 알았겠는가? 왕손의 어미를 네가 처음에 매우 사랑하여 우물에 빠진 듯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하여 마침내 죽였느냐? 그 사람이 아주 강직하였으니 반드시 네 행실과 일을 간하다가 이로 말미암아서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또 장래에 여승의 아들을 반드시 왕손이라고 일컬어 데리고 들어와 문안할 것이다. 이렇게 하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겠는가?” 『영조실록(英祖實錄)』38년(1762년) 5월22일
세자는 자신을 모함한 고변에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나경언과 면질하기를 청했으나 영조는 더욱 크게 화를 내면서 “이 또한 나라를 망칠 일이다. 대리하는 세자가 어찌 죄인과 면질해야 하겠는가?”라고 했다.
세자는 다시 울면서 “이는 신에게 본래부터 있던 울화증입니다”라고 하자 영조는 “차라리 미쳐버리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고 하며 당장 물러가라고 명했다. 이에 세자는 밖으로 나와 금천교 위에서 날이 밝도록 대죄(待罪)했다.
그렇다면 세자를 장차 죽음으로 몰아넣을 고변서의 주모자인 나경언은 도대체 어떤 자였는가? 나경언의 신분에 관해서는 두 가지 기록이 남아 있다.
하나는 ‘윤급의 옛 청지기’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액정 별감 나상언의 형’이라는 것이다. 이것으로 미루어볼 때 나경언은 중인 계층의 인물로 보인다.
그런데 이토록 미천(微賤)한 신분의 사람이 한 나라를 ‘대리청정하고 있던 세자’를 음해하고자 투서한 것을 형조참의와 영의정이 심각하게 의논해 임금에게 힘써 아뢰었다는 사실도 이해하기 힘들지만 아무런 제재도 없이 친국하는 자리에서 다시-그것도 직접- 임금에게 고변서를 올렸다는 것 또한 도무지 말이 되지 않았다.
이것은 특정 세력의 조직적 비호와 음모가 개입되지 않는 한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여기에서 나경언의 고변서를 배후 조종한 세력이 노론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단서를 찾아보자.
먼저 나경언이 청지기를 지냈다는 윤급은 노론 준론(峻論)의 주요 인물이었다. 준론은 영조의 탕평책조차 거부하고 비판했던 노론 강경파였다. 나경언은 노론 특히 강경파 세력과 일찍부터 개인적으로 인연을 맺고 있던 인물이었던 셈이다.
또 다른 단서는 『영조실록』에서 찾을 수 있다.
“나경언이라는 자는 액정별감 나상언의 형이니 사람됨이 불량하고 남을 잘 꾀어냈다. 가산(家産)이 탕패되어 자립하지 못하게 되자 이에 세자를 제거할 계책을 내어 형조에 글을 올려 내시들이 장차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했다.” 『영조실록(英祖實錄)』38년(1762년) 5월22일
경제적으로 궁색한 처지에 있던 나경언이 노론 세력에게 돈을 받고 세자 제거 계획에 나섰다는 얘기다. 그런데 나경언은 고변이 있던 날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 ‘거짓 고변’임을 실토했다. 한 나라를 대리청정하는 세자를 모함한 죄는 극형으로 다스려야 했지만 웬일인지 영조는 오히려 나경언을 처형하라는 신하들을 심하게 나무라면서 “어찌 나경언이 역적이겠느냐!”고 호통쳤다.
“나경언이 어찌 역적이겠는가? 오늘날 조정 신하들의 치우친 논의가 도리어 부당(夫黨)과 자당(子黨)이 되었으니 조정의 신하가 모두 역적이다.” 『영조실록(英祖實錄)』 38년(1762년) 윤 5월6일
‘부당(夫黨)과 자당(子黨)’이라는 언급에서 볼 수 있듯이 이미 영조는 세자를 자식이 아닌 정적(政敵)으로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나경언의 고변이 낳은 파문은 이렇듯 서서히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노론은 이제 세자의 숨통을 끊을 ‘최후의 일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럼 이렇듯 자신을 제거할 노론의 음모가 구체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위기 상황에서 세자는 어떻게 행동했을까?
세자는 고변이 있은 날로부터 계속 시민당 뜰과 월대에서 영조에게 죄를 청하는 한편 사건의 배후를 캐기 위해 포도청을 움직여 나경언의 처자를 붙잡아 심문했다. 그 결과 안성저(安城邸) 사람이 사주했다는 자백을 받아냈다.
이에 안성저 사람을 붙잡아 심문하자 이번에는 우의정 윤동도의 아들인 윤광유가 사주했다는 자백이 나왔다. 그러나 윤동도는 소론 명문가 출신으로 세자를 모함할 까닭이 없었다.
세자는 안성저 사람이 자신과 소론을 이간질하려고 거짓 자백을 했다는 사실을 알았고, 이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노론이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자신을 제거할 ‘승부수’를 뽑아 들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노론이 짠 함정에 꼼짝없이 걸려든 세자의 운명은 이제 오로지 영조의 처분을 기다리는 길 이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영조에게 세자는 더 이상 보살펴야 할 자식이 아니라 제거해야 할 정적(政敵)에 불과했다. 권력이란 그렇듯 비정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