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싣는 순서 |
① 영조가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한 이유는? |
② 재앙의 징조…나주 벽서 사건과 토역정시(討逆庭試) 사건 |
③ 세자, 노론의 일당 독재에 맞서다! |
④ 노론, 마지막 승부수를 걸다 - 나경언의 고변 |
⑤ 영조,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다! |
⑥ 영조와 노론이 빚은 최악의 참극 - “권력과 왕위(王位)는 천륜(天倫)보다 우선 한다!” |
노론은 이 사건을 기회로 삼아 -강경파든 온건파든 상관없이- 소론 전체를 역적으로 모는 대공세에 나섰다. 소론을 제거한다면 ‘일당 독재’를 향한 노론의 미래는 활짝 열려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대리 청정하는 세자가 번번이 노론에게 찾아온 이 ‘천재일우의 기회’에 제동을 걸었다.
나주 벽서 사건의 파장과 피바람이 나날이 커지고 있던 1755년(영조 31년) 3월25일 사간원의 사간(司諫) 박치문이라는 자가 세자에게 이 사건에 연좌되어 처벌당한 죄인 중 남자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죽여야 한다는 글을 올렸다.
거기에는 훗날의 근심을 끊어 버리기 위해서는 이참에 소론을 아예 박멸해 버려야 한다는 노론의 섬뜩한 생각이 가감 없이 드러나 있었다.
“이번에 허다하게 연좌된 죄인으로 종이 되어 먼 변방이나 외딴 섬에 안치된 자의 수가 매우 많아서 더러는 같은 고을에 종이 된 경우가 심지어 수삼 인이나 되니 이 또한 근심을 막는 도리가 아닙니다. 더구나 남북으로 정송(定送)한 자가 더욱 많으니, 이는 더욱 염려할 만합니다.
이에 신은 여자로 종이 된 자를 제외하고 남자로 종이 된 자는 대조(大朝 : 영조)께 아뢰고 대신과 여러 신하들에게 물어서 일체 남김없이 죽여 화근을 끊어버리도록 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영조실록(英祖實錄)』31년(1755년) 3월25일
세자는 “불허(不許)한다”는 답을 내렸다. 그러나 노론은 집요했다. 일주일이 지난 4월2일에는 사헌부 지평 홍양한이라는 자가 다시 상소를 올렸다. 그는 이미 유배형에 처해진 권두령, 임천대(윤지의 심복), 홍익원(윤지의 사위), 이광사(이진유의 조카), 조동하, 김윤, 허계 등을 모두 죽이고 신치운은 법에 따라 처벌할 것을 주청했다. 그러나 세자는 ‘불종(不從)’, 곧 따르지 않았다.
다음날에는 사간원의 헌납 윤동성이 국문장(鞠問場)에서 거짓으로 정신을 잃고 횡설수설하는 수법으로 수사를 현혹케 한 죄를 물어 민후기를 죽이라고 상달(上達)했고, 그 다음날에는 사헌부 지평 심곡이 조동하, 김윤, 허계를 처형하고 또한 기언표와 이양조를 다시 엄중하게 국문하라고 청했다. 이 역시 세자는 ‘병불종(竝不從)’, 곧 모두 따르지 않았다.
4월9일에는 지평 심곡이 또 다시 박태신과 김윤 등을 노적(孥籍 : 죄인과 가족들을 극형에 처하거나 노비의 적에 올리고 재산을 몰수하는 형벌)하라고 상소하고, 사간원 정언 정상순과 송문재는 ‘박태정을 잡아오던 도사를 잡아다 국문하여 엄중히 죄를 물으라’고 청했다. 그러나 세자는 영조에게 ‘번거롭게 아뢰기가 어렵다’며 모두 거절했다.
삼사(三司)의 간관 및 언관들의 상소는 노론의 당론(黨論)이나 다름없었다. 삼사의 관료들을 앞세워 공론(公論)의 형식을 거친 다음 대신(大臣)들이 나서는 방식은 당론(黨論)을 관철할 때 흔하게 사용하는 전형적인 수법이었기 때문이다.
노론은 처음 한두 차례는 자신들의 주청을 ‘불허한다’는 세자의 태도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잇따른 상소에도 세자가 한결같이 ‘불허한다, 따르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하자 비로소 그 정치적 의도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세자의 행동에는 노론이 더 이상 소론을 정치적으로 핍박하거나 박해하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태도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었기 때문이다.
토역정시(討逆庭試) 사건 이후에도 소론을 역적으로 모는 노론의 공세가 집요하게 계속되었지만 세자는 조금도 자신의 뜻을 꺾으려고 하지 않았다.
토역정시 사건이 일어난 지 한 달이 지난 6월10일 사간원의 사간 심발이라는 자가 이미 관작을 추탈당한 이광좌에게 유봉휘나 조태구처럼 역률(逆律)을 추가 시행하라고 청하는 한편 조태억의 관작을 추탈하라고 주장했다. 사건의 직접 당사자인 소론 강경파는 물론 이참에 온건파도 씨를 말려 버리겠다는 기세였다.
7월7일에는 노론계 유생(儒生)들까지 나서서 이광좌의 노적(孥籍)을 청하고 살아남은 소론의 좌장 격인 이종성과 박문수에게는 당역(黨逆)한 죄를 물어 엄히 다스리라고 상소했다. 그러나 세자는 ‘불허(不許)한다’는 말 이외에 다른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상황이 여기에 이르자 노론은 이제 세자가 자신들의 정치적 파트너가 아닌 정치적 적대자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깨우쳤다. 노론은 영조에 이어 세자가 임금의 자리에 오르면 자신들이 소론에 가한 정치 보복의 칼날이 다시 자신들을 향할 수 있다는 생각에 소름이 오싹 돋았다.
노론은 영조와 자신들이 30여년이라는 기나긴 시간을 거쳐 간신히 확립한 ‘국시(國是)’를 세자가 단숨에 뒤집어버릴 수도 있다고 의심했다. 노론은 이 ‘번안국시(翻案國是)’를 문제 삼아 세자를 모함했고 영조와 세조 사이를 이간질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노론이 금과옥조처럼 여긴 ‘국시(國是)’란 도대체 무엇인가?
영조는 ‘나주 벽서 사건과 토역정시 사건’이 일어난 그해 11월 노론의 영수 김재로의 주도하에 『천의소감』를 간행하도록 했다. 여기에서 영조는 자신을 둘러싼 과거사에 대한 의혹과 비난을 덮어 버리거나 없애려고 한 ‘신유대훈’에서 한 발 더 나아갔다.경종 시절의 왕세제 책봉과 대리청정을 주도한 노론의 행위는 역모(逆謀)가 아닌 나라와 영조를 위한 충신(忠臣)의 행동이라고 규정했기 때문이다.
또한 경종의 독살 의혹과 관련해서는 『천의소감』에 “그때 게장을 낸 일은 있으나, 그것은 어주(御廚 : 임금의 식사를 올리는 수라간)에서 관례대로 바친 것일 뿐 왕세제(王世弟 : 영조)가 드린 것이 아니다”고 써넣도록 했다.
이 『천의소감』의 간행으로 영조와 노론은 경종에게도 충심(忠心)을 다한 충신이 된 반면 소론은 왕세제 대리청정과 경종 독살 의혹을 악 이용해 영조와 노론을 핍박한 역적(逆賊)이 되어 버렸다.
김재로가 지은 『천의소감』총론(總論)을 한 번 들여다보자.
“경자년(更子年)에 경종께서 왕위를 이으셨다. 그런데 맏아들로 대통을 이을 희망이 없어지고 삼종(三宗)의 혈맥과 경종의 동기(同氣)는 오직 금상(今上 : 영조)이 있었을 뿐이다. 저 무리(소론)들이 하루아침에 국본(國本)이 정해지면 다시는 뜻을 얻을 기약이 없다고 여겨서 조태구가 먼저 모혐(冒嫌)의 설을 내어서 협박하고 고집하다가 금상께서 왕세제(王世弟)로 책봉되자 유상운의 아들 유봉휘가 다급하게 글을 올려 그 분노의 붓을 방자하게 내둘렀다. 또한 조태구가 이를 따라 권장하고 비호하였다.
경종의 병환이 더욱 심해지자 왕세제에게 대리하라는 명령이 있어 4대신(四大臣 : 김창집․이이명․조태채․이건명)이 연명 차자를 올리자 김일경 등 일곱 명의 흉적(凶賊)이 상소를 올려 권세를 도둑질했다. 환관과 궁녀들 역시 이들과 결탁하여 임금께서 자리를 내놓는다는 의론이 있게 했다. 또한 목호룡을 사주하여 죄 없는 사람을 무고해 옥사를 일으켜서 위로는 능멸하고 핍박하는 계교를 부리고 아래로는 도륙하는 재앙을 일으켰다. 김일경은 또 미리 흉한 말을 소장(疏章)과 교서에 묻어두어 무신년(戊申年 : 이인좌의 난)에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는 역모의 구실이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황천(皇天)과 조종(祖宗)의 신령의 힘을 입어 하늘의 벌을 내려 끝마쳤는데, 그 나머지 잔여 세력이 다시 당(黨)을 얽어서 노려보다가 지금의 역모에 이르러 더욱 심하게 되었다. 본원(本源)이 한 번 어그러지면 지류(支流)가 점차 넓어져서, 조금씩 흐르는 것을 막지 않는다면 마침내 강과 큰 내를 이루게 되는 것이니 어찌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건창,『당의통략』
노론에게는 이 『천의소감』이 곧 국시(國是)였다. 소론을 역적으로 몰고 노론 일당 독재의 역사적 정통성과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로 이만한 것이 어느 곳에 있겠는가?
『천의소감』이 밝힌 국시(國是)가 뒤집어지지 않는 한 노론의 집권은 영원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천의소감』의 내용이 부정당하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노론은 자신들이 소론에게 가한 것과 마찬가지로 다시 ‘피의 숙청’을 당할 수도 있었다.
영조의 분노와 노론의 정치 보복이 광풍처럼 휩쓴 조정에서 외로이 소론을 비호하며 맞서 싸우는 세자의 모습은 곧 노론의 우려와 불안감을 증폭시킬 수밖에 없었다.
노론은 지난 날 경종을 남인과 소론의 임금으로 보았듯이 이제 세자를 소론의 임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노론은 다시 ‘영조 사후(死後)’를 대비하는 권력 투쟁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경종 시절의 악몽을 또 다시 겪을 수는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뜻에 맞는 인물을 골라 임금으로 옹립하는 ‘택군(擇君)’을 해서라도 반드시 노론의 일당 독재를 지켜야만 했다. 노론의 권력욕은 참으로 무섭도록 집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