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가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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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가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한 이유는?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4.09.15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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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 읽기>① 영조의 ‘콤플렉스’와 사도세자의 비극

조선시대 역사와 인물을 통해 인문학 접근을 시도하고 있는 <헤드라인뉴스>는 새로운 기획으로 <조선사 읽기>를 선보인다. 500년 조선의 역사가 남긴 흔적은 여전히 우리 시대를 관통하고 있어 그 어떤 학문보다 과거를 통해 현재를 조명하고 미래를 꿈꾸는 적절한 지침이 될 것이란 판단에서다. 따라서 <조선사 읽기>는 때로는 사건으로, 때로는 인물로 조선의 역사를 되짚어보고 그것의 현대적 의미를 찾는 작업의 일환이 될 것이다.  -편집자 주-

◇ 글 싣는 순서
① 영조가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한 이유는?
② 재앙의 징조 - 나주 벽서 사건과 토역정시(討逆庭試) 사건
③ 세자, 노론의 일당 독재에 맞서다!
④ 노론, 마지막 승부수를 걸다 - 나경언의 고변
⑤ 영조,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다!
⑥ 영조와 노론이 빚은 최악의 참극 - “권력과 왕위(王位)는 천륜(天倫)보다 우선 한다!”

▲ 영조의 어진
[한정주 역사평론가] 1749년(영조 25년) 1월22일 밤. 대궐에는 비가 억수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그날 승정원 입직 승지 박필재와 김상복은 갑작스럽게 내려진 영조의 봉서(封書)를 뜯어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봉서의 첫 머리에 ‘중옹과 백이’라는 글자가 있고 하단에는 ‘을유년의 등록’을 상고하라는 글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중옹과 백이’는 아우에게 왕위를 사양하고 도망친 중국 고사 속 인물이고 ‘을유년의 등록’이란 1705년(숙종 31년) 숙종이 세자(경종)에게 선위하겠다고 명했던 일을 말함이다. 즉 영조는 또 다시 세자에게 ‘선위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때 세자의 나이 열다섯이었다.

영조의 선위 소식이 전해지자 대궐 안팎은 삽시간에 큰 혼란에 빠져 들었다. 세자는 촛불을 밝히고 춘방(春坊 : 세자시강원)의 관원들을 불러 다급하게 대책을 논의했다. 승정원과 홍문관의 관료들 또한 영조에게 다시 봉서를 올리며 선위의 명을 거둘 것을 청했다.

그러나 영조는 ‘세 가지 까닭’을 거론하면서 선위할 뜻을 굽힐 마음이 없음을 밝혔다. 그것은 첫째 저승에 가서 떳떳하게 황형(皇兄), 즉 경종을 만나겠다는 것이고, 둘째 자신은 임금이 되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셋째 병이 들어 고치기 어려워 쉬고 싶다는 것이었다.

“내가 감히 삼종(三宗)의 혈맥(血脈)이라는 자전(慈殿 : 인원왕후)의 하교를 어기지 못해 비록 이 자리에 있었지만 임금 노릇하기를 즐겨하지 않는 마음은 25년이 하루와 같았다. 날마다 원량(元良 : 세자)이 나이 들기를 기다렸는데 이제 다행스럽게도 열다섯 살이 되었다. 오늘 이 일은 하나는 저승에 가서 황형(皇兄 : 경종)의 용안을 뵐 수 있도록 하고자 함이고, 하나는 남면(南面)하기를 즐겨하지 않는 마음을 이루고자 함이며, 하나는 갑자년(영조 20년) 이후 병이 더해 하루아침에 고치기 어려울까 두려운 마음에 정사에서 벗어나 정양하고자 함이다.” 『영조실록(英祖實錄)』25년(1749년) 1월22일

영조는 ‘신유대훈(辛酉大訓)’을 통해 자신의 왕세제 책봉과 임금 즉위를 둘러싼 온갖 의혹과 비난을 벗어 던졌다고 생각한 이후에도 틈만 나면 ‘삼종(三宗)의 혈맥’ 운운하면서 자신은 애초 왕세제도 임금도 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음을 드러내려고 애썼다.

여기에서 ‘삼종의 혈맥’이란 인조의 둘째 아들인 효종과 그 외아들인 현종 그리고 다시 현종의 외아들인 숙종의 혈통을 이어받은 자손이라는 뜻으로 영조가 스스로 왕세제가 되고 또 임금이 될 수밖에 없었던 불가피성과 정당성을 내세우는 절대적 준거가 되었다. 즉 경종 말고는 삼종(三宗)의 혈맥을 이어받은 사람은 자신 밖에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혹은 ‘당연하게도’ 임금이 되었다는 논리다.

어쨌든 영조가 이러한 심경을 자주 드러냈다는 것은, 곧 그가 여전히 자신의 왕세제 책봉→대리청정→경종 독살→임금 즉위와 관련한 ‘과거의 콤플렉스’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는 사실을 반증해준다.

‘저승에 가서 황형(皇兄)의 용안을 뵐 수 있도록 하고자 한다’는 말 역시 스스로 임금의 자리에 아무런 미련이 없음을 보여줌으로써 권력에 눈이 멀어서 왕세제가 되고 이복 형(경종)을 독살했다는 소문과 비난에서 벗어나려 한 영조의 심정이 우회적으로 드러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영조는 다음날인 1월 23일 선위할 뜻을 거두어 달라고 청한 시․원임 대신과 비변사의 재신(宰臣) 그리고 승정원과 홍문관,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원들에게 더욱 자세하고 완곡하게 이와 같은 입장을 재차 밝혔다.

그런데 여기에는 전날 밝힌 ‘세 가지 까닭’ 이외에 세자의 제왕 수업과 관련한 ‘두 가지 이유’가 덧붙여져 있었다. 영조는 선위를 명한 자신의 본심은 모두 ‘다섯 가지’라고 못 박았다.

“내가 반드시 본심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 『상훈(常訓)』의 술편(述編)에서는 ‘자신을 한사(寒士) 포의(布衣)에 견준 까닭에 전후에 시를 지으면서 자주 부운(浮雲)자를 썼다.’고 했는데, 이것은 바로 내 마음을 말한 것이다. 나에게 형제가 있었다면 어찌 중옹와 백이가 되지 않았겠는가?

둘째 내가 세제(世弟) 책봉을 받고 나서 문득 갑진년(1724년, 영조 즉위년)에 이르렀는데, 오늘날의 괴로운 마음을 이룬 다음에야 저승에 가서 황형(皇兄 : 경종)을 뵐 면목이 있다.

셋째 마음속의 병이 해가 갈수록 점점 심해 온갖 정무를 보살필 수 없다. 넷째 세자는 기품이 뛰어나지만 뒷날 과연 어떻게 행동할지 알지 못하는 까닭에 내가 살아 있을 때 보려고 한다.

다섯째 비록 보통 사람도 부형(父兄)이 있으면 다른 사람이 그 자제(子弟)를 업신여기지 못하는 것인데 세자가 어찌 시국의 형편에 따른 편벽한 내용의 상소를 알 수 있겠는가? 오늘 기반을 세우고자 한다.

이 다섯 가지는 모두 내가 나라를 위해 마음 아파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병이 심한 것이 또한 가장 견디기 힘들다.” 『영조실록(英祖實錄)』25년(1749년) 1월23일

영조가 말을 마치자 가장 먼저 당시 노론의 영수였던 영의정 김재로가 나섰다.

“세자의 강학(講學)이 하루가 급한데, 어찌 번거로운 국사(國事)를 맡겨서 시간을 아껴 힘써야 할 공력에 방해가 되게 하십니까?”

소론계인 좌의정 조현명 또한 영의정 김재로의 말을 거들었다.

“지금 전하께서 나이가 늙었다고 하여 임금의 짐을 벗고자 하신다면 세자의 마음이 어떠하시겠습니까? 지금 이렇게 온갖 정무를 돌보게 한다면 세자의 강학(講學)에 방해가 될 터인데, 어찌 아버지의 자식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뜻이겠습니까?”

이렇듯 노론과 소론을 막론하고 조정 관료 모두가 선위할 뜻을 거두라고 요청했지만 영조는 끝내 듣지 않았다.

▲ 사도세자
지난 밤 부터 쏟아지던 빗줄기가 이때 한층 사나웠는데 세자가 갑자기 폭우를 무릅쓰고 달려와 헌함(軒檻) 밖에 엎드렸다. 그러나 영조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에 세자가 엎드려 울자 영조는 그때서야 세자에게 앞으로 오라고 했다.

세자가 계속 울며 일어나지 않자 영조는 다시 “세자는 앞으로 오라”고 했다. 이렇게 하기를 4∼5차례 한 다음에야 세자가 헌함(軒檻)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엎드려 계속 울음을 그치지 않자 영조는 “왜 울기까지 하느냐?”고 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신하들이 모두 울음을 삼켰고, 영조 역시 눈물을 흘렸다. 여러 신하들이 다시 입이 닿도록 힘써 선위의 뜻을 거두어 달라고 간청하자 영조는 여러 사람의 마음을 살펴서 다시 생각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뒤에 비로소 “선위가 부득이하다면 대리청정은 어떻겠는가?”라고 하교했다. 이에 영의정 김재로가 대리청정 역시 안 된다고 하자 영조는 “나는 결코 임금 노릇을 하지 않겠다”면서 버럭 화를 냈다.

당시 그 자리에 있던 신하들은 영조의 뜻이 선위가 아닌 대리청정에 있음을 다행스럽게 여기고 재빨리 “뜻을 받들겠다”고 하자 영조는 그때서야 ‘선위 소동’을 일으킨 자신의 본심을 털어놓았다.

“어린 세자가 아득히 나랏일을 모르는 상태로 두었다가 훗날 만약 노론과 소론에 의해 잘못된다면 내가 비록 알더라도 어찌 깨우쳐 줄 수 있겠는가? 오늘 나의 행동은 훗날 반드시 효험이 없지 않을 것이다.”

영조는 그 자리에서 즉시 대리청정의 전교를 받아쓰도록 했다. 이어 대리청정의 절목(節目)을 정해 사람을 쓰는 것(인사권)·군사를 동원하는 것(병권)·사형에 관련된 것(생사여탈권)과 변방의 일에 관련된 사항을 제외하고는 모든 정무(政務)를 세자가 대리해 처리하도록 했다. 단 매월 15일과 30일 두 차례 대리청정하는 세자와 여러 재신(宰臣)들이 함께 입시하여 나랏일에 관해 영조의 재결(裁決)을 받도록 했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내몬 ‘대리청정’의 서막이 오르는 순간이었다.

이때부터 세자는 뒤주에 갇혀 죽음을 맞은 1762년(영조 38년) 윤5월까지 무려 13년 동안이나 대리청정을 했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둔 지 사흘 째 되는 그해 윤5월15일 경화문에 나아가 ‘자신이 다시 정사에 복귀하는 이유를 밝히는’ 반교문을 반포하고 세자의 대리청정을 폐했다.

여하튼 처음 선위할 뜻을 밝혔다가 세자 대리청정의 명을 내린 이틀 동안의 기록을 추적해보면 영조의 속마음이 애초부터 ‘선위’가 아닌 ‘대리청정’에 있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즉 자신이 곧바로 세자 대리청정을 들고 나서면 신하들이 극력 반대할 것이 뻔한 상황에서 먼저 선위의 뜻을 밝힌 다음 예상한 대로 신하들이 반대하고 나서자 불쑥 ‘대리청정의 카드’를 내민 것이다. 신하들이 선위나 대리청정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상황을 만든 다음 자신의 뜻을 관철시킨 것이다.

그렇다면 영조가 선위라는 카드까지 활용해가면서 세자의 대리청정을 관철시키려고 한 의도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그것은 크게 두 가지였다.

먼저 첫째 날 밝힌 ‘세 가지 까닭’에서 영조는 ‘과거의 콤플렉스’, 즉 자신은 애초부터 임금의 자리에 크게 마음이 없었음을 만천하에 드러내는데 더 큰 강조점을 두었다. 그러나 다음날 앞의 세 가지 까닭에 덧붙여 밝힌 ‘두 가지 이유’에는 분명 ‘세자의 미래’ 즉 당론을 조정해 국정을 주도할 수 있는 정치적 능력을 길러주고 싶은 속마음이 깊게 배어 있다.

전자의 영조가 어두운 과거에 얽매여서 세자를 이용한 노회한 권력자의 모습이었다면, 후자의 영조는 세자가 조선의 밝은 미래를 열어나가기를 바라는 진정한 아버지의 모습이었다고 하겠다. 이렇듯 당시 영조가 명한 선위와 대리청정에는 나쁜 의도와 좋은 의도가 ‘반반씩’ 섞여 있었다.

그러나 그 의도가 어떻든 간에 영조의 행동은 세자를 별다른 대책도 없이 ‘권력 투쟁(당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는 결과를 초래했다. 특히 영조 스스로 즉위 초와는 다르게 점점 노론 당적의 임금임을 자처하고 또한 조정이 점차 노론 일색이 되어가고 있는 마당에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한 것은 곧 노론의 시각과 입장을 강요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만약 세자가 기꺼이 노론의 임금이 되겠다고 했다면 별 문제가 없었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발생할 ‘재앙’을 영조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한 재앙의 징조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나타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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