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주=역사평론가] 아무리 승경(勝景)을 자랑하는 명산(名山)이라도 비로소 명사(名士)를 만나야 그 진가(眞價)를 드러내는 법이다.
15세기 조선 사회를 뒤흔들었던 광사(狂士) 김시습과 17세기 조선의 사상계에 파란을 일으켰던 기사(奇士) 박세당이 있었기 때문에 수락산은 오늘날까지 맑고 드높은 선비의 기상이 서려있는 산이 될 수 있었다.
여하튼 수락산 아래 서계(西溪) 가의 석천동에 거처하며 몸소 농사를 지으며 살면서도 박세당은 후학(後學)을 가르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또한 1680년(52세) 무렵부터는 『대학(大學)』에서부터 『중용(中庸)』·『논어(論語)』·『맹자(孟子)』·『상서(尙書:서경(書經))』·『모시(毛詩:시경(詩經))』등에 이르기까지 유학의 경전에 자신의 독자적인 견해와 주석을 달았다고 해서 20년 후에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죽음을 맞는 빌미를 제공한 『사변록』시리즈를 본격적으로 저술하기 시작했다.
또한 당시 주자학자들이 금서(禁書)이자 요서(妖書)로 배척한 노자의 『도덕경(道德經)』과 장자의 『장자(莊子)』에 주해(註解)를 다는 연구 작업도 했다.
당시 박세당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그가 입을 해악(害惡)을 염려하여 저술 활동을 중단할 것을 수차례 당부했지만 그는 권력의 칼날도 세상의 비난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갔다.
그러다가 죽음을 맞기 1년 전(1702년) 이경석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으면서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老論) 세력이 ‘조선의 주자(朱子)’라고 추앙하던 송시열을 ‘올빼미’에 비유해 비판한 일로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이 일이 빌미가 되어 다음해(1703년) 조정 안의 노론 세력과 이들에게 아첨하는 사대부와 부화뇌동한 성균관의 유생(儒生)들이 한패거리가 되어 박세당이 주자의 장구(章句)와 주해(註解)를 불경하게도 함부로 고치는 이른바 ‘사문난적(斯文亂賊)’의 중죄를 지었다면서 형벌에 처하라고 들고 일어났다.
결국 박세당은 삭탈관작(削奪官爵)을 당하고 전라도 옥과(玉果)로 유배형에 처해진다. 그러나 연로(年老)하다는 이유로 다행히(?) 유배될 위기를 모면하고 수락산 석천동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온 지 불과 석 달 후인 1703년(숙종 29년) 75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았다.
그런데 박세당은 일찍이 노론 세력이 여론 몰이를 하여 자신을 이단(異端)으로 단죄하고 죽이려고 할 것을 예견하고 70세 무렵 ‘서계(西溪)’라는 호를 빌어서 직접 자찬묘지명(自讚墓誌銘)이라고 할 수 있는 ‘서계초수묘표(西溪樵叟墓表)’를 짓고 여기에서 “차라리 세상과 어울리지 못하고 홀로 쓸쓸하게 살아갈망정 끝내 ‘이 세상에 나왔으니 이 세상에서 하라는 대로 하고 이 세상이 좋아하는 대로 하겠다’는 사람들에게 머리를 숙이거나 마음을 낮추려고 하지 않았다”는 평생의 뜻과 의지를 분명하게 밝혀두었다. 몸은 죽어도 정신은 남아 후세에 전해지기를 바랐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