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암(靜庵) 조광조① “어진 사람(仁者)은 고요하다”
상태바
정암(靜庵) 조광조① “어진 사람(仁者)은 고요하다”
  • 한정주 역사평론가
  • 승인 2014.07.20 12: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⑫ 선비정신의 사표, 동방 사현(四賢)⑤
▲ 정암(靜庵) 조광조

[헤드라인뉴스=한정주 역사평론가] 김굉필이 사림의 역사에 기여한 공적(功績)은 수없이 많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중요한 공적은 유배지인 평안도 희천에서 정암(靜庵) 조광조를 가르친 일이다.

조광조는 연산군 시절 두 차례의 사화(士禍)로 뿌리가 뽑힐 위기에 처한 사림파를 다시 일으켜 세웠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사림이 중종 시대에 ‘개혁 정치’를 주도할 만큼 거대한 정치세력으로 성장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조광조가 없었다면 16세기 ‘사림의 전성시대’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사림에 끼친 그의 공적은 위대했다.

김굉필과 그의 평생 동지였던 정여창이 훗날 사림의 추앙을 받아 성균관의 문묘에 종사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조광조를 제자로 두었기 때문이라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니다.

조광조는 어천찰방(魚川察訪)이라는 벼슬을 산 아버지의 임지(任地)로 유배온 김굉필을 만나면서 성리학에 눈을 뜨게 된다.

김굉필은 전라도 순천으로 유배지를 옮기기 전 2년 동안 평안도 희천 유배지에서 조광조에게 학문을 전수했다. 이때 조광조는 김굉필의 고고한 인품과 높은 학문 그리고 해박한 지식에 빠져들어 밤낮을 잊고 공부에 몰두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는 사림파가 크게 화란(禍亂)을 입은 직후로 세상 사람들은 모두 성리학을 ‘재앙을 부르는 학문’이라고 하며 멀리 했다. 이 때문에 성리학 공부에 몰두한 조광조를 두고 주변 사람들은 ‘광자(狂者)’ 혹은 ‘화태(禍胎)’, 즉 미치광이나 재앙을 품고 있는 존재라며 비웃고 손가락질했다.

그 뒤 김굉필이 갑자사화 때 죽임을 당했으므로 조광조에 대한 사람들의 비난과 손가락질은 더욱 심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조광조는 성리학의 이상을 실현하겠다는 꿈을 버리지 않고 더욱 열심히 학문을 닦고 자기 수양에 힘을 쏟았다.

조광조의 행적을 기록한 『정암조선생연보』에 따르면 그는 “『소학(小學)』, 『근사록(近思錄)』과 사서(四書 :『논어』·『맹자』·『대학』·『중용』)를 위주로 삼아 독서했다. 그런 다음에 여러 경서(經書)와 성리학 서적 그리고 『통감강목(通鑑綱目)』등을 공부했다. 오랜 세월 동안 참된 학문이 쌓여서 덕행과 재능을 성취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털끝만치도 자신을 속이지 않고 홀로 삼가는 일에 더욱 전력을 다했다”고 한다.

‘정암(靜庵)’이라는 조광조의 호(號) 역시 이러한 학행(學行) 수련의 과정에서 나왔다. 유학에는 성리학을 비롯한 다양한 학파(學派)가 존재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이들이 유학의 바이블로 숭상하는 책은 공자의 언행을 기록한 『논어(論語)』라고 할 수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