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 이이···기호사림(畿湖士林)의 본향(本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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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 이이···기호사림(畿湖士林)의 본향(本鄕)
  • 한정주 역사평론가
  • 승인 2014.02.14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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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③

 

▲ 율곡 이이

율곡(栗谷):기호사림의 본향, 경기도 파주
대한민국 사람치고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이를 잘 모르는 어린아이들조차도 오천원권 화폐에 나오는 그의 초상화는 알고 있다. 따라서 이이는 우리 역사 속 인물 가운데 최고 유명인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처럼 이이를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역설적이게도 그의 삶과 철학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또 드물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이이하면 떠오르는 지명(地名)을 생각해보라. 대부분 어렵지 않게 ‘강릉 오죽헌’을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정작 이이의 삶과 철학의 주요 무대는 경기도 파주의 율곡(栗谷)과 황해도 해주의 석담(石潭)이었다. 이이가 자신을 드러내는 호(號)로 삼았을 만큼 이 두 곳은 퇴계 이황과 더불어 조선의 성리학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이이의 얼과 혼이 서려있는 장소다.

이이와 삶을 함께 한 조선의 16세기는 단언컨대 ‘사림(士林)의 시대’였다. 사림의 역사는 멀리 포은 정몽주의 학통을 이은 야은 길재에게서 찾을 수 있다.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길재는 경북 구미에 은둔했다. 이곳에서 길재는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면서 성리학 연구와 후학을 가르치는데 일생을 바쳤다.

당시 길재의 학통을 이어받은 사람은 김숙자였다. 김숙자는 다시 자신의 아들인 김종직에게, 김종직은 김굉필에게, 김굉필은 다시 조광조에게 성리학의 학통을 넘겼다.

 

▲ 이이하면 떠올리는 ‘강릉 오죽헌’ 전경

정몽주와 길재의 학통을 잇는 사림세력이 중앙의 정치무대에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한 때는 조선의 9대 임금인 성종(成宗) 시대였다. 사림의 중앙 정계로의 진출에 물꼬를 튼 사람은 김종직과 김굉필이었다.

그들을 중심으로 한 사림 세력은 중앙 정치 무대에 등장함과 동시에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훈구파와 격렬한 갈등과 대립을 겪는다. 성리학의 ‘도학정치(道學政治)’를 이념으로 삼은 사림파의 눈에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경제적 이익을 독점하는 훈구파는 개혁 대상 0순위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치적 갈등과 대립은 연산군(燕山君) 시대에 들어와 일어난 두 차례의 선비 살해 사건인 ‘무오사화(戊午士禍)’와 ‘갑자사화(甲子士禍)’로 훈구파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그러나 연산군 시대가 끝나고 중종(中宗)이 왕위에 오르자 당시 두 차례의 사화(士禍)에서 살아남은 사림세력은 다시 중앙 정치무대로 복귀한다. 하지만 초기 중종의 후원 아래 추진한 조광조의 개혁정치가 훈구파의 거센 반격에 꺾이면서 사림세력은 다시 ‘기묘사화(己卯士禍)’의 재앙을 만나고 만다.

세 차례의 큰 재앙을 겪은 이후에도 사림세력은 자신들의 신념과 의지를 꺾지 않고 유배지와 향촌(鄕村) 등지에서 계속 성리학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을 쏟았다. 이 때문에 사림세력은 비록 중앙 정치무대에서는 쫓겨났지만 오히려 지방과 향촌에서는 단단하게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이렇듯 지방을 중심으로 탄탄한 세력을 구축한 재야 사림은 외척(外戚)세력이 권력을 전횡한 인종(仁宗)과 명종(明宗) 연간에 다시 중앙 정치무대로의 진출을 시도한다. 이때 사림들은 외척세력 간 권력투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을사사화(乙巳士禍)’와 ‘정미사화(丁未士禍)’를 치르면서 또 다시 큰 피해를 입는다.

그러나 외척정치의 수장격인 문정왕후(文定王后 : 명종의 어머니)가 죽은 후 사림세력은 윤원형(문정왕후의 남동생)을 축출하고 마침내 권력을 거머쥐게 된다.

이후 사림은 특별한 경쟁세력 없이 조정의 인사와 정사를 좌지우지하게 된다. 이제 사림은 조선의 정치권력과 학문 및 사상을 본격적으로 지배하기 시작했다.

70여 년에 걸쳐 훈구파와 외척세력에 맞서 싸웠던 사림세력이 마침내 승리를 거머쥔 이때가 바로 16세기 중반인 1565년경이었다. 특히 16세기에는 조선 유학사상 가장 걸출한 대학자가 여럿 배출되어-마치 경쟁이라도 하듯이-성리학을 연구하고 후학(後學)을 양성하며 ‘사림의 전성시대’를 활짝 열었다.

 

▲ 퇴계 이황

여기에서 필자가 말한 대(大)유학자는 1501년 태어난 동갑내기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그리고 그들보다 35년 늦게 세상에 나온 율곡 이이를 가리킨다. 이들 세 사람은 특정 지역을 기반 삼아 학문을 연마하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즉 퇴계 이황은 경북 안동(安東)과 예안(禮安), 남명 조식은 경남 진주(晋州)와 합천(陜川), 율곡 이이는 경기도 파주(坡州)와 황해도 해주(海州)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이 때문에 사림은 그 지역적 기반과 학통 및 학맥에 따라 크게 영남사림(嶺南士林)과 기호사림(畿湖士林)으로 구분된다.

또한 퇴계 이황이 영남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낙동강의 왼쪽인 경북 안동과 예안에 자리하고 있다고 해서 ‘강좌학파(江左學派)’, 남명 조식은 낙동강의 오른쪽에 위치한 경남 진주와 합천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해서 ‘강우학파(江右學派)’, 율곡 이이는 수도인 한양 인근 지방인 경기도 파주와 황해도 해주에 근거하고 있다고 해서 ‘기호학파(畿湖學派)’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하튼 사림은 선조(宣祖) 때에 들어와 선왕(先王)인 명종(明宗) 시대 외척정치의 잔재를 청산하는 문제로 갈등을 겪으면서 극심한 의견 충돌과 정치적 대립을 빚게 되는데, 이때 영남사림은 동인(東人)이 되고 기호사림은 서인(西人)의 주축을 이루었다.

그 후 영남사림은 다시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으로 나뉘었는데 남인은 이황, 북인은 조식의 문하생들이었다. 그래서 남인은 이황을 자신들의 종조(宗祖)로 삼았고, 북인은 조식을 자신들의 종조(宗祖)로 섬겼다.

 

▲ 남명 조식

서인의 주축을 이룬 기호사림은 대부분 이이의 문하생들이었기 때문에 이이는 당연히(?) 서인의 종조(宗祖)가 되었다. 그리고 이이 사후 30여년이 지난 1615년, 그의 수제자였던 사계 김장생이 생전에 이이가 성리학을 강습하고 후학들을 가르쳤던 경기도 파주의 자운산(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소재)에 이이를 배향(配享)하는 ‘자운서원’을 세운 뒤부터 율곡(栗谷)을 중심으로 한 파주 일대는 기호사림의 본향(本鄕)이자 서인의 성지(聖地)로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더욱이 ‘자운서원’에서 가까운 자운산 기슭에는 이이와 그 가족들의 묘역(墓域)까지 자리하고 있어서 조선 시대 내내 이곳은 사시사철 서인 측 사대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서인 측 사대부의 파주 율곡 방문은 일종의 ‘성지 순례’와 같은 엄숙하고 장엄한 행사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사실은 남인과 북인 그리고 서인이 종조(宗祖)로 삼은 이황, 조식, 이이는 사림의 당파 분열과 당쟁(黨爭)에 직접적인 책임이 없다는 것이다. 단지 그들의 제자나 문하생들이 서로 당파를 구분하거나 혹은 당쟁의 명분을 얻기 위해 이황의 학통을 계승했느니 혹은 조식의 학통을 이어받았다느니 혹은 이이의 학통을 물려받았다는 식으로 다투는 과정에서 반강제적으로 사색당파(四色黨派)의 원조가 되어버렸다.

애초 이이가 율곡을 거점으로 삼아 성리학을 닦고 후학을 양성해 조선의 정치와 사상을 올바르게 개혁하려고 했던 큰 뜻은 외면당한 채 이이 사후 그와 관련된 유적지 역시 안타깝게도 서인 세력의 정치적 명분과 이념적 정통성을 옹호하는 도구로 전락해버렸다.

 

▲ 임진강을 끼고 있는 경기도 파주시 일대

당파나 당쟁에 관한 얘기는 이쯤에서 접어두고 이제 도대체 이이는 경기도 파주의 율곡과 어떤 인연을 갖고 있기에 자신을 대표하는 호로 삼을 만큼 이곳을 소중하게 여겼던 것일까 하는 궁금증을 풀어보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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