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대로 맡길 따름이다…“아침에 떨어진 꽃은 저녁에 주워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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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대로 맡길 따름이다…“아침에 떨어진 꽃은 저녁에 주워도 괜찮다”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4.01 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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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이덕무의 『이목구심서』와 『선귤당농소』로 본 일상의 가치와 미학㊼
 

[한정주=역사평론가] 유하(柳下) 홍세태가 일찍이 육호룡과 더불어 벗이 되었다. 홍세태는 항상 육호룡에게 “너의 이름은 부르기가 매우 불길(不吉)하다. 빨리 고치도록 하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그 뒤 육호룡은 마침내 죄를 입고 처형당하였다.

홍세태는 나이가 들어 늙자 손수 그 시를 산정(刪定)하고 베개 속에 백은(白銀) 70냥을 넣어두었다. 일찍이 여러 문하생에게 과시하면서 말하기를 “이 돈은 후일에 내 문집을 발간할 밑천이다. 너희들은 알고 있어라.”고 하였다. 아! 문인들이 명예를 좋아하는 것이 예로부터 이와 같았다.

지금 사람마다 비록 그의 시를 익숙하게 외우지만, 홍세태는 사망해 그의 귀는 이미 썩어버렸는데 어찌 그 소리를 들을 수 있겠는가?

이미 죽은 다음에는 비록 비단으로 장식하고 옥으로 새긴다 한들 기뻐할 수 없다. 또한 비록 불살라버리고 물에 빠뜨린다고 한들 화를 낼 수도 없다.

아무런 기척 없이 고요하고 지각(知覺)조차 없는데 어찌 그 희로(喜怒)를 논할 수 있겠는가. 어찌하여 생전(生前)에 백은 70냥으로 돼지고기와 백주(白酒)를 사서 70일 동안 즐기면서 일평생 굶주린 창자나 배불리 채우지 않았단 말인가.

그러나 매월당(梅月堂) 김시습은 시를 지은 다음 문득 물에 던져버렸다. 또한 최근에 들어서는 이언진이 살아 있을 적에 자신의 원고 절반을 불태워버렸고, 죽은 다음에 다시 절반의 원고를 순장(殉葬)하였다.

이러한 일은 늙은 홍세태와는 비록 다르지만 형태와 자취가 사라져 없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거나, 반대로 썩어 없어지지 않기를 도모하는 것은 또한 각자가 좋아하는 대로 맡겨둘 따름이다. 어찌 반드시 아름다운 옥이라고 찬사하고 나쁜 옥이라고 비방하겠는가. (재번역)

柳下洪世泰 嘗與陸虎龍爲友 每謂虎謂曰 汝名呼之甚不吉 急改之也 虎龍後竟伏誅 柳下老來 手自刪定其詩 枕中貯白銀七十兩 甞誇視諸門生曰 此後日刊吾集資也 汝輩識之 噫文人好名 自古而然也 今人人雖爛誦其詩 柳下耳朶已朽 安能聽之 旣歸之後 雖繡裝玉刻 不可喜也 雖火燔水壞 不可怒也 寂然無知 又何論其喜怒哉 何不生前把銀作七十塊 沽猪肉白酒爲七十日喜歡 緣以澆其一生枯膓也 然梅月堂作詩輒投水 近日李彦瑱 生前焚半藁 死後殉葬半藁 與此翁雖異 其不畏泯滅 與圖不朽 亦可任他所好而已 何必譽瑜而毁玦哉. 『이목구심서 3』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

공자가 한 말이다. 나는 이러한 말보다 차라리 이러한 말이 좋다.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朝花夕拾).”

루쉰(魯迅)이 남긴 말이다. 공자의 말은 숨통을 조이는 것과 같이 답답하다.

한 번 왔다 가는 소풍가는 삶, 왜 구태여 ‘도(道)’라는 굴레를 뒤집어쓰고 ‘공명(功名)’이라는 멍에에 얽매여 산단 말인가? 삶이 반드시 목적이 있어야 하고, 의미가 있어야 하고, 가치가 있어야 하는가?

루쉰의 말은 숨통을 터주는 것과 같이 편안하다. 아침에 떨어진 꽃을 꼭 아침에 주워야 하는가? 그냥 두었다가 저녁에 주워도 괜찮다. 그저 내가 좋아하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맡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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